우곡(隅谷) 정온(鄭溫)은 그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멀쩡한 눈이 멀었다 하여 사봉면 사곡리에 내려와 우곡정(隅谷亭)에 은거하니, 여말(麗末) 두문(杜門) 72현(賢)의 한 분이라 일컫는다.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몇 차례나 칙사를 보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온 칙사는 솔잎으로 눈동자를 찔러 보았으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아 그대로 돌아갔다 한다.
우곡은 스스로 시를 짓기를,
진봉산 아래 삿갓 쓴 사람은 進鳳山前戴笠人
인삼 꽃밭 옛 나라 백성이라요. 人蔘花下舊王民
장님을 핑계하고 돌아 와 이제 보니 托盲去後今來見
눈은 있어도 말 못하는, 죽지 않은 몸인데 有目無言不死身
이성계의 사위 이제(李濟)도 그 높은 충절을 기려 다음과 같이 읊었다.
솔잎이 어찌 굳은 절개를 꺾을 수 있으랴. 松葉豈能撓確節
그 이름 천년토록 햇빛같이 빛나리. 令名千載日爭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