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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飛鳳山)

진주의 진산(鎭山)이다. 비봉은 봉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봉이 항상 날고 있다는 것으로, 선비가 많이 배출된다는 뜻이다. 『진양지』의 월아산 조에 이르기를 "산 동쪽에는 비봉의 형국이 있어 예로부터 정승이 나고, 산 서쪽에는 천마의 형국이 있어 장수가 날 것" 이라고 한 것이 곧 그것이다.

서봉지(棲鳳池)

“(가마못이)서봉지로 불릴 때는 봉황이목욕하고 나와서 봉두에서 잠시 쉬었다 봉알자리로 날아갔다고 한다.”
『상봉동지』(上鳳洞誌편찬위원회, 2015)

“(중략)날아간 봉이 뜨거운 가마가 있으면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 하여 못의 이름을 가마못이라 명명했다는 말이다.(중략)이렇게 지세를 억제한 것은 왕실이라고 한다.”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3책』

봉란대(鳳卵臺, 봉(鳳) 알자리)

봉 알자리

시내 상봉동 비봉산을 마주보는 평지에 "봉(鳳)의 알자리"라는 곳이 있다. 흙으로 두둑하게 쌓아올려 산과 같이 만들고 그 한가운데 움푹 파여서 마치 새들의 알자리와 같이 만들었다.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옛날 이 근처에는 민가도 없었고 주위의 우거진 숲들과 어울려서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한편 이 봉 알자리에는 진양 강씨의 씨족사회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담겨져 전해 오고 있다. 진주 강씨들 집안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고 대봉산 밑에 웅거하여 권세를 부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대봉산 위에 봉암(鳳岩)이 있기 때문이라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봉암을 깨어 없애고 봉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하니 날아간 봉을 다시 부르려면 알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지금의 위치에다가 「봉의 알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봉암(鳳巖)

비봉산에 있다. 바위가 봉조(鳳鳥)의 형상이다. 전해 오기를 「강(姜)씨가 성 한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고려 때 이지원(李之元)이 이를 시기하여 쳐서 부수니 그 바위 속에 흰 돌이 있어 큰 바가지와 같은 것이 네 개였는데 모두 피가 흘렀다. 뒤에 척준경(拓俊京)이 참소를 입어 형제가 장류(杖流)되었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대룡골

옛날에 대룡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봉원초등학교 북서쪽의 깊숙한 골짜기를 말한다. 소룡골 위쪽(북쪽)의 아파트 단지 뒤편의 큰 골짜기 마을이다.

소룡골

진주보건대학교 뒤편 봉원초등학교 북서쪽 대룡골 너머에 있는 작은 골짜기를 이르며 옛날에 소룡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약새미골

소룡골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대룡사의 암자가 있었던 곳이며 지금은 약샘이 있어 약물이 난다. 음력 6월이면 부녀자들이 약물맞이로 널리 애용하던 곳이며 지금도 약간의 샘물이 나오고 있다.

황새등

대룡골 동편 지금 봉원초등학교가 있는 자리를 가리키며 이 지형의 생김새가 황새처럼 보인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비봉루(飛鳳樓)

비봉루

시가의 북쪽에 자리 잡은 비봉산의 기슭에 아담하게 서 있는 누각으로 앞뒤로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그림같이 맑고 산뜻한 단청을 나타내어 이곳을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이 누각은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충신이고 석학(碩學)이신 포은 정몽주(포은 鄭夢周)선생이 영남을 두루 돌아보던 중 이곳에 머물러 쉬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飛鳳山前 飛鳳樓 비봉산 앞 비봉루에
樓中宿客 夢悠悠 잠든 객이 꿈길이 머네
地靈人傑 姜河鄭 지령의 인걸은 강하정이요
名興長江 萬古流 긴 강과 같이 만고에 흐르네

진주의 독지가 정상진(鄭相珍)이 16대조 700년 전의 남은 행적을 그리워하는 뜻에서 1939년에 그 당시 500원을 들여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한 건물이며 이곳에 포은공의 비가 세워졌다.

의곡사

비봉산 동쪽 계곡에 있다. 진주시 상봉동 415번지에 위치하며, 전통사찰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 고장 전통』과 전통사찰 제69호 조을 보면, 의곡사는 신라 문무왕 5년(665)2월에 혜통조사(慧通祖師, 惠通의 誤)가 창건하고, 애장왕9년(808)에는 원측선사(圓測禪師)가, 또 고려조 명종24년(1194)에는 월명선사(月明禪師)가 각각 중건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및『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원측(613∼693)은 혜통(惠通)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고, 월명은 신라 경덕왕(재위 742∼764)때의 인물이니, 그 기록들은 실로 믿기 어렵다. 그리고 혜통(惠通)은 문무왕 초에 당나라에 건너갔다가 동5년(665)에 견당사정 공과 함께 귀국하여 왕망사에 있었고, 원측(圓測)은 진평왕49년(627)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건너가 당의 태종으로부터 도첩을 받아 그곳 불교계의 대표적 역할을 수행하던 중 뒷날 신문왕이 귀국을 청했으나 돌아오지 않고 효소왕5년(696)에 84세로 입적하였으며, 월명(月明)은 경주의 사천왕사에 있으면서 "도솔가"와 "제망매가"등의 향가를 지은 분이니 이들 혜통조사·원측·월명선사가 진주에 와서 의곡사를 창건 또는 중건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과장된 것이다. 더욱이 의곡사는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전하는 바가 없을뿐더러 그 곳에는 신라·고려시대의 유물이 한 점도 없으니 그 기록들은 더더욱 믿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반면에 『진양지』를 보면, 의곡사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10년(1618)에 병사 남이흥이 산승 성간으로 하여금 중건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의곡사에 대한 최고(最古)의 기록이다.

의(義)골목

잇골목이라 하기도 한다. 의곡사 안 골짝을 윗골이라 하고 의곡사 앞을 지나 진고 강당 동쪽 기슭을 끊고 지나 진중동쪽 담벽으로 해서 옛적 형장터(검찰. 법원→문화방송) 서쪽으로 지나 종로 큰길로 연결되었던 길. 형장터 골목의 서쪽 편에 5·60년 전 박찬병소아과 의원이 있었다.

봉산사(鳳山祠)

상봉동 879번지인 비봉산 서쪽 기슭을 끊어 세워져 있다. 이 사당(祠堂)은 고구려(高句麗)26대 영양왕(영陽王) 시대의 병마원수 강이식(兵馬元帥 姜以式)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고려 또는 조선시대에 이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알 길이 없다. 1976년 장군의 후예인 진주강씨 문중에서 기금을 모아 이곳에 세웠다고 한다.

개미골

상봉동 여래사가 있는 골짜기로 개미가 유달리 많이 있어서 개미골이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못안골

가마못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못재

가마못에서 북쪽 집현면 사촌리로 넘어가는 산 고개인데 못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종묘장(種苗場)

지금 진주여고 자리가 밭이었는데 그 2층 목조건물이 있었다. 이것이 종묘장 건물 이었다. 이곳에서 주위의 밭을 이용하여 여러 묘목을 실험 재배하여 개량된 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분양 배포하였다. 1944년 이 자리가 진주여고 건물이 서기로 내정되었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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