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군 13년(1621) - 순국 28년 후
-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진주 관기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고 기록
- 유몽인의 [어우야담] 인륜편의 "효열"대목에 기록
·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만력 계사년에 김천일이 거느린 의병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에 맞서 싸웠다. 마침내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얼굴과 매무새를 아리땁게 꾸미고 촉석루 아래 우뚝한 바위 위에 있었으니, 바위 밑은 바로 깊은 강물 가운데로 떨어지는 곳이었다.
·여러 왜병들이 바라보고 좋아했지만 모두들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했는데, 한 장수가 홀로 나서서 다가왔다.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면서 끌어당겼다. 이때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었다.
·임진왜란 때에 관기로서 왜적을 만나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개 한 사람뿐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거의 잃어버렸다. 저들 관기는 음탕한 창녀들이라 '곧고 맵다[貞烈]'고 일컬을 수가 없다지만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또한 거룩한 임금의 교화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의 하나가 아닌가? 차마 나라를 저버리면서 왜적을 따르지 않았으니 충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서글픈 일이로다.
○ 인조 7년(1629) - 순국 36년 후
- 진주의 선비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고 전각
- 진주 사람들이 펴낸 진양속지(晉陽續誌) 나타난 글
·정대륭(鄭大隆), 자(字)는 여준(汝準)이고 대영(大榮)의 아우다. 글 짓고 글씨 쓰는 솜씨를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효성이 지극했는데 아버지가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아파하며 남쪽으로 내려와 진주에 살게 되었다, 의기사 앞 바위에 새긴 '의암(義巖)' 두 글자는 곧 그의 글씨다.
○ 효종 2년(1651) - 순국 58년 후
- 오두인의 [의암기]에는 관기 진주 창기라 하고 논개의 죽음은 "여엄집 부인들을 부끄럽게 했다"고 기록. 촉석루에 [의암기]라는 현판을 개시
-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의암기[義巖記]에 실린 대목
·성이 무너지던 날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가 머리를 바치며 살기를 바랐으나, 관기 논개라는 이는 맹세코 왜적과 함께 살 수 없다고 죽음 보기를 고향 돌아가듯이 하면서 얼굴과 옷을 곱게 꾸미고 이 바위(의암) 위에 홀로 우뚝하게 섰다. 여러 왜적들이 바라보고 좋아라 했으나 바위가 위태로워 두려워할 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는데, 갑자기 한 왜가 거침없이 똑바로 내달아와 꼬여 내려고 했다. 이에 논개가 웃으며 맞이하여 마침내 그 왜를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 민백순(閔百順 1711-1774)의 <<임진록(壬辰錄)>>에 실린 대목
·도적이 성에 들어오자 다투어 관기와 미녀들을 약탈했다. 논개라는 이가 있었는데, 일부러 매무새를 아름답게 꾸미고 교태를 부리니까. 도적의 장수가 좋아하면서 지분거렸다. 더불어 촉석루 바위 위에서 놀다가 논개가 도적 장수를 껴안고 벼랑으로 떨어져 죽었다.
○ 경종 1년(1721) - 순국 128년 후
- [비변사 신보]등 7건에는 진주 관기 기생의기라 하고 논개의 급복을 위해 노력한 내용을 기록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진한(崔鎭漢) 1652-1740이 비변사에 올린 장계 대목
·성이 무너지던 날 대장(師臣)과 수령과 여러 장수와 피 흘려 싸우던 서른 나믄 사람들이 모두 절개를 지키며 의롭게 죽은 뒤에, 논개라는 한 기녀가 남아 있었다.
·그는 문득 나라를 위하여 적을 죽일 수 있는 계책이 떠올라, 고운 옷을 입고 강가 우뚝한 돌 위에 홀로 앉아서 거문고를 켜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성 위에 있던 왜적 가운데 한 장수가 보고 좋아서 곧바로 논개가 앉은 곳으로 내려왔다.
○ 경종 2년(1722) - 순국 129년 후
- 진주의 선비정신은 논개의 사적이 민몰될 것을 염려하여 [의암사적비를] 건립하면서 진주관기라고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