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 16년(1740) - 순국 147년 후
- 병사 남덕하는 영조에게 "의기정포"를 계청하여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고, [의암사적비]의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 개시
- 경상우병사 안숙(安숙) <<충민창열양사조향절목(忠愍彰烈兩詞助饗節目)>>에 실린 대목
· <남덕하 병사가 의기사당을 세울 허락을 받았다는 기록> 경신년 본영 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다시 스물한 분의 벼슬을 올릴 것과 더불어 의기(義妓)에게 사당을 세워 포상하기를 계청(啓請)하여 마침내 임금이 허락을 받았다.
○ 영조 16년(1740)
- 박태무의 [의기전]에는 의기창기라고 기목
- 유몽인의 <어우야담> 인륜편의 "효열"대목에 기록
· 이 무너져 다시 어찌할 바가 없이 되자 논개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나 헛되이 죽어서는 도움이 없는데 어찌 구덩이에 빠져 죽기를 고집하겠는가?" 하면서 매무새를 꾸미고 고운 옷을 입고서 의암에 올라 거문고를 켜며 노래를 부르니 왜장이 좋아라며 달려왔다. 드디어 반가운 듯이 맞이하여 함께 춤추다가 춤이 무르익자 적을 끌어안고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 안민영의 <<금옥총부>>에 실린 대목
· 논개와 함께 이 바위 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 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논개가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 영조 33년(1757) - 순국 164년 후
- 관찬 [여지도서]의 진주 인물란에는 논개를 수록하고 의기라고 기록
- 유몽인의 <<어우야담>>인륜편의 "효열"대목에 기록
·의기논개 : 계사년(1593)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왜장을 유인하여 바위 위에서 안고 강에 떨어졌다. 경종 때의 처사 정식은 그것이 민몰될 것을 개탄하여 병사 최진한에게 논의를 일으켜서, 장계(狀啓)로 조정에 알리고, 의암 위에 비를 세워 정려(旌閭)하였다.
○ 영조 42년(1766) - 순국 173년 후
- [청구야담]의 [진양성 의기사생]조에는 진양의기라고 기록하고 촉석루 아래의 암벽에는 '일대장강천추의연' 8자를 전각
- 지은이 알 수 없는 <<청구야담>>에 실린 진양성 의기사생에 한 대목
· 이때 논개는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추어 입고서 왜장 중 가장 걸출하게 생긴 자를 찾아 만나고 거짓으로 교태를 부리니 왜장이 기뻐하면서 그녀를 겁탈하고자 하였으나, 그녀는 허락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 왜장을 유인하여 강가의 바위 위로 걸어 나오게 하였다. 그곳에서 함께 춤을 추었는데, 이 바위는 강가에 우뚝 솟아 있어 삼면이 모두 깊은 못이었다. 그래서 왜장의 허리를 안고 강물로 떨어졌다, 왜군의 진영에서는 크게 놀랐다. 난이 평정된 후 논개를 기려 '의기(義妓)'라 하고 강가에 사당을 세워 제를 지내고 그 바위를 '의기암(義妓巖)' 이라고 이름 하여 '일대장강 천추의열(一帶長江千秋義烈)'이라는 여덟 자를 새겨 두었다.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巖)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기녀가 강에 떨어진 것을 낙화에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 정조 3년(1779) - 순국 186년 후
- 병사 홍화보는 [의기사]를 보수
○ 정조 4년(1780) - 순국 187년 후
- 정약용의 [진주의기사기]에는 기생으로 기록
- 정약용(1762-1836)의 <<진주의기사기(晉州義妓詞記)>>에 실린 대목
· 옛날 왜적들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강점하였을 때의 일이다. 한 의로운 기생이 있어서(그 기생은 논개이다) 왜놈의 괴수를 유인하여 강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 위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 춤이 어우러지자 그는 왜놈을 끌어안고 강물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여기 이 사당은 바로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아! 어찌 맵디맵고 훌륭한 부인이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