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조 31년(1832) - 순국 239년 후
- 관찬 [진주목읍지]의 진주 인물란에 논개를 수록하고 과기 의기 기생으로 기록
- 순조 32년(1832) <<진주목읍지>>인물편 중신조에 실린 대목
· 의기 논개는 계사년(1593)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가 왜추(倭酋)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더니, 경종 때의 처사 정 식(鄭식)은 그것이 민몰(泯沒)될 것을 개탄하여, 병사 최진한(崔鎭漢)에게 의논을 불러일으켜서 장계(狀啓)로 조정에 알리고, 의암 위에 비를 세워 표창하였다. 명암 정 식이 찬 하니 이러하였다. 어우 유몽인(於于柳夢寅)의 야담에 이르기를.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 고종 5년(1868) - 순국 275년 후
- 목사 정현석은 [의암별제]를 특설
- 박원, 정현석(璞圓, 鄭顯奭)의 <<교방가요>>중 「의암별제 가무(義巖別祭 歌蕪)」조에 실린 대목
· 진주병영에 있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진주성이 함락되고 6만이 모두 항절하니, 기생은 몸단장을 아름답게 하고 촉석루 아래의 물속 바위 위에 홀로 앉았으니, 왜장 중에서 가장 사나운 괴수 하나가 바위 위에 훌쩍 뛰어오르자, 기생은 웃음으로 맞이하여 희롱 끝에 마침내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물속에 떨어졌다. 그 후 왜군들은 곧 군대를 거두어 달아났다. 이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영을 내려 의논개의 사당을 세워 매년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 고종 29년(1892) - 순국 299년 후
- [영남읍지]의 진주 인물란에 논개를 수록하고 의기로 기록
- <<영남읍지>>에 실린 「진양지」의 인물편 중의조에 실린 대목
· 의기의 이름은 논개이니 진주의 기생이다. 계사년에 성이 함락되자 몸단장을 곱게 하고 남강의 가파른 바위 위에 서있었는데, 왜장이 보고 기뻐하므로 더불어 놀다가 왜장의 허리를 안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 후 병사 남덕하는 사유를 갖추어 임금에게 호소하여 남강 위에 정려와 사당을 세웠다. 그 바위를 의암이라 하고, 가파른 벼랑에 '일대장강 천추의렬' 이라는 여덟 자를 각했다.
○ 광무3년(1899) - 순국 306년 후
- [진주군읍지]의 진주인물란에는 논개를 수록하고, 의기생으로 기록
- <<진주군읍지>>의 인물편 중의조에 실린 대목
· 의기의 이름은 논개이니 진주의 기생이다. 계사년에 성이 함락되자 몸단장을 곱게 하고 남강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왜장이 보고 기뻐하므로 더불어 놀다가 왜장의 허리를 안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 1925년 - 순국 322년 후
- 강효석의 [대동기문]중 [논개포장어초암]조에는 진주 기생으로 기록 기타 관련자료
- 강효석(姜斅錫)의 <<대동기문>>에 실린 대목
· 창의사 김천일이 거느린 병사가 육만에 이르니 앞날에 견주어 열 곱절이라 사람들이 모두 성을 지키는 일은 없다고 하되 논개가 홀로 걱정했다. 그래서 김천일이 걱정하는 까닭을 물으니 논개가 대답하기를, 앞날에는 비록 병사가 적었으나 윗분들이 서로 사랑하여 호령이 한결같아 이길 수 있는 근본이 되었지만 이제는 비록 병사는 많으나 통솔이 이루어지지 않고 장수가 병법을 모르니 이래서 걱정이라고 했다. 김천일이 듣고 요망한 말을 한다면서 목을 베려하자 좌우 사람들이 말려서 그만두게 했다.
○ 기타관련자료 : 진주문화를 찾아서 1
- 진주성 동쪽 문 앞에 변영로의 <논개>를 새겨 놓았다.
- 진주 문화원(1991) 새김, 樹州 卞榮魯(변영로)
- 변영로(1897 - 1961)의 시집 <조선의 마음>>(1924)에 기록
- 민백순(閔百順 1711-1774)의 <<임진록(壬辰錄)>>에 실린 대목
· 도적이 성에 들어오자 다투어 관기와 미녀들을 약탈했다. 논개라는 이가 있었는데, 일부러 매무새를 아릅답게 꾸미고 교태를 부리니까. 도적의 장수가 좋아하면서 지분거렸다. 더불어 촉석루 바위 위에서 놀다가 논개가 도적 장수를 껴안고 벼랑으로 떨어져 죽었다.
- 안민영의 <<금옥총부>>에 실린 대목
· 논개와 함께 이 바위 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술이 반쯤 취하자 논개가 왜장에게 춤을 추자고 청하니 왜장은 기꺼이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논개가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 호남유림(1799)에서 엮은 <<호남절의록>>에 실린 대목
· 진주성이 떨어지자 몸단장을 곱게 하고 적장 둘을 유인해 남강의 우뚝한 바위 위에서 맞춤을 추다가 양팔로 두 왜적을 끼고 강에 떨어져 죽었다. 뒷사람들이 그 바위에다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비석을 세웠다.
- 통감부시절(1908에 민간에서 만든 역사책<<초등대한역사>>본조(本朝) 제56절에 적힌 글
· 왜장이 진주에 들어와 촉석루에서 기녀와 악공을 불러 놀이 잔치를 벌일 적에, 관기 논개가 왜장이 취한 것을 틈타 등에 업고 강물에 떨어지니, 왜장이 뛰어나오고자 하나 기녀의 손에 굳게 잡혀 풀리지 않아 물속 속으로 끌려 들어가 빠져 죽으니
-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이 논개의 충의를 말한 대목
· 한 개의 적장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한 개의 적 군단을 섬멸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한 개 기녀의 충의 애족, 애국의 일념으로 이러한 만고 미담이 영원히 빛날 것이다.
- 신경(申炅 1613-1653)의 <<재조번방지>>에 실린 대목
· 이십오 일에 도적이 성안에다 불을 던지는 바람에 불에 탄 집들이 매우 많고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니 성안의 사기가 떨어졌다. 서예원은 겁에 질려 당황하여 호령이 뒤집어지고 더구나 김천일과 더불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늙은 기생이 조용히 장군의 부하에게 말하기를, "앞날 김목사께서 이 성을 지킬 때에는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협력했기 때문에 끝까지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일의 형세를 살피건대 앞날과는 아주 딴판이니 우리들은 생사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김천일이 이를 듣고 민심을 현혹시키는 요망한 말이라 하여 그 기생을 목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