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농민봉기
1862년 5월 23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진주 백성들이 봉기하니 이의 파급은 12월7일 황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민란이 연달아 일어났다.
세금, 병역, 부역, 환곡 등의 명목을 더해 받아들인 세금종류만도 백 가지에 가까웠으니 진주농민봉기는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끝내는 동학란의 불씨가 된 조선말기의 대 사건이었다.
이른바 진주농민봉기는 세제개혁을 위한 대중봉기로서 이는 민권운동이라 할 것이다.
○ 의병투쟁사 (晋州民亂)
진주는 신라 시대부터 경상도의 중심 도시로 조선 말기까지 경상우도의 수부(首府)였다. 북서쪽으로 지리산과 덕유산을 배경으로 한 하동·산청·덕산·함양·안의·합천·삼가·거창 등을 등지고, 동남으로는 의령·함안·사천·고성·남해를 안고 있는 행정과 농업의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과 관리들의 탐획에 반기를 들고 농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으니, 철종 13년(1862)에 일어났던 이른바 '진주민란'이다. 당시 이 사건은 인근의 지역으로 번지기 시작하여 삽시간에 전국 농민 봉기로 확대되었다. 그 이후 진주 지역에는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계속되었는데, 갑오농민봉기 때에는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당시 민중 투쟁은 삶의 확보와 반 외세, 반봉건 투쟁이었다. 일제의 상품 시장으로 변한 조선 경제는 비틀거렸고, 관리들의 탐획과 지주들의 봉건적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말이 아닌데다 갑오년엔 유래 없는 가뭄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때마침 육십령과 섬진강 너머로부터 불어닥친 갑오농민봉기는 일제의 경복궁 점령과 갑오억변으로 농민들로 하여금 '보국 안민', '척왜양(斥倭洋) 창의'를 부르짖게 했으며, 을미왜란과 단발령 소식에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노응규의 진주의병은 안의 거의에서부터 연원한다. 안의는 당시 독립된 군으로, 진주에서 약 1백70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진주의진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면서 노응규와 진주의병에 관한 사실을 기록한 박준필의 유고와 노응규의 친필일기를 종합해 보면, 노응규는 갑오왜란 이후 변복령·을미왜란·단발령 등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안의 장수사에 딸린 용추암의 승려 서재기(徐再起: 본명 寬成), 문인 정도현·박준필·최두연·임기홍 등과 전 사과 임경희, 선비 성경호 등 14, 5명과 함께 진주로 향했다. 진주 향교에 도착한 이들은 촉석성 안의 동정을 살피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가 이튿날 새벽 의병들을 이끌고 일시에 성을 점령하니 이 날이 건양 원년(1896)정월 초여드렛 날 이었다.
의병들이 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순검 2명을 포함, 10여 명이 살해되고, 관찰사 조병필, 경무관 김세진 등 관리들은 황급히 달아나고 말았다.
비록 노응규가 소수의 인원으로 봉기 했지만 이처럼 촉석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진주농민봉기(1862) 이후 수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던 농민 봉기로 인해 민중 의식이 고조돼 있었음은 물론, 직·간접적 피해자가 많았는데다 국모 명성황후가 일제 폭도들에게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민족적 분노가 폭발했다는데 원인이 있다. 더구나 정한용이 본주 사람들을 규합하는가 하면, 전 찰방 오종근과 전 수찬 권봉희, 삼가(쌍백)의 노유 정재규 등의 합세가 큰 힘이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진주 향교의 장의였던 한진완 (의병 진압 뒤에 악형으로 반신불수가 됨)등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노응규 의병장은 서재기를 의진의 선봉장으로 삼아 진주 인근지역에 파견하여 일제와 부왜 세력 척결에 나섰다. 먼저 진주 서북방 50여리 떨어진 단성(현 산청군 단성면)으로 들어가 그 곳 군수를 '개화죄'로 처단하려 했으나 군수가 민포군 50여 명을 의병에 가담시키는 등 의병 활동에 적극 협조하므로 석방하였다. 고성과 하동 군수는 의병이 온다는 소식에 도주했는가 하면, 함안 군수는 의병들에게 처단되는 등 점차 경남지역에 의병들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병이 지배하는 지역이 점차 확대되자 노응규는 행정의 공백을 없애려고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방을 붙였다는 기록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영인본) 5권에 나타나고 있다. 이 방을 통하여 인물의 선발 기준이 신분보다는 능력 본위였음을 알 수 있고, 능력 본위의 인물을 선발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올바른 행정을 펴는 동시에 의병투쟁을 본격화했으니, 노응규를 비롯한 의진 수뇌부의 경륜을 짐작할 만하다.
그리하여 행정 제도를 갑오왜란 이전의 체제로 환원하여 경륜이 높고 사리에 밝은 인물들은 좌수·호장·형리·이방 등으로 임명하고, 인근의 고을에도 전령을 보내 관속을 새로이 임명, 모든 공무를 평상시와 같이 집행하게 하여 민심의 동요를 막으니 민심은 더욱 의병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 무렵 대구로 달아났던 경무관 김세진이 영남 영병 60여 명을 이끌고 진주의병을 진압코자 진주동북방 70여 리에 위치한 의령에 도착했으니 이 날이 정월 열 엿샛 날이었다. 진주의진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선봉장 서재기, 본주의진의 오 선봉장, 좌 ·우익장, 중군장 등으로 하여금 5백40여명의 병사를 이끌게 하고 그 날밤 의령으로 나아갔다. 진주의병은 의령 정암진 일대에서 관군과 4차례 공방전을 벌여 관군 3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전리품을 노획한 뒤에 회군함으로써 진주의병들의 사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그리고 진주 참서관 오현익이 중방들과 더불어 삼가의 토곡까지 도주했으나 요로에 배치된 방수군에게 붙잡혀 진주로 압송되었다. 의병들은 그들을 무수히 난타하고 큰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가 심문했는데, 오현익의 옷 속에서 진주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부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서한과 동래부 관찰사에게 일본군 지원을 요청하는 자신의 서한이 발각되었다.
이 글에서 밀지는 을미왜란 이후 고종이 각지의 의병장에게 의병 궐기를 고무하는 것이었는데, 충청도 류인석, 강원도 민용호, 경기도 김하락 의병장 등에게 내린 것과 유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에도 경무관 김세진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함께 현풍(현 경북 달성군 현풍면)을 거쳐 진주로 향했지만 번번이 패퇴하고 말았으니, 경남 일원은 동래부 일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역이 의병 천하가 되었던 것이다. 진주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기세를 꺾고 난 뒤에는 사기가 더욱 충천했다. 그들은 일제 침략의 발판이자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부산 공략에 나섰다.
당시 일제는 진주의병의 김해·부산방면의 진출에 대해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면밀한 정보를 수집, 의병들의 움직임에 대처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영인본) 5권에 의하면 진주 의병의 일부(선발대인 것으로 추정됨)가 김해에 진출한 것은 3월 29일(양력) 새벽이었는데, 의병의 군세는 약 1백 여명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의병들은 관아를 점령하고 부왜 군수를 체포하려 했으나 이미 의병의 내습을 예견하고 부산으로 도주한 뒤였기 때문에 본진의 명령에 따라 전곡을 충분히 갖추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한편, 상인 혹은 노동자로 가장하여 김해·구포·부산 등지는 물론 일본인 거류지까지 잠입하기도 했다.
한편 노응규가 이끄는 본진은 1만 여명의 대부대를 형성, 김해에 다달았는데, 대부분 전투 부대가 아니었고, 또한 일본군 본진이 부산에 있던 관계로 직접적으로 대부대끼리의 접전은 없었다. 그러나 일부 의병들은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 날이 4월 11일, 12일(양력)이었다. 이 전투에서 의병들은 일본군 4명을 살상시킨 반면, 의병은 4명이 전사하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주의병은 무기의 열세와 의진 수뇌부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음에 진주로 회군하고 말았다. 진주의병은 진주로 돌아온 직후 중지에 따라 정한용이 주축이 된 5백여 명을 삼가에, 서재기가 이끄는 5백 여명을 안의에 각각 분산 배치하고, 노응규는 소수의 병력으로 진주병영에 잔류했다.
이 무렵 서울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의병 진압을 위해 호남에 파견되었던 참령 이겸제는 기우만이 이끌었던 의병을 해산시키고 진주로 향했다. 이겸제는 시위대 병사 5백명과 대구 진위대 병사 2백명을 이끌고 와서 4월 24일 밤 성벽을 부수고 공격하니 3개월 째 계속되었던 진주의병들의 토왜 투쟁은 마침내 끝이 난다.
그러나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이 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진주의병은 이미 해산된 뒤였다. 전라도 의병을 진압하고 진주로 말머리를 돌린 이겸제는 여느 곳의 경우처럼 진압 작전을 전개하기 며칠 전부터 고종이 내린 '의병해산령'을 진주의진에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노응규는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주변을 정리하여 진주성(촉석성)을 나왔으며, 그가 삼가를 거쳐 서울로 향하고 있을 무렵 이겸제가 이끄는 관군이 진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노응규는 진주성 안에서 의병을 해산하고 삼가에 주둔하던 정한용 부대에 들러 상경하는 이유를 말하니, 정한용은 그를 옥에 가두고 말았다. 정한용·정재일 등이 노응규를 옥에 구금했던 사실로 훗날 그들은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한편, 안의에 유진하고 있던 서재기 부대도 안의 서리배의 흉계에 의해 서재기가 피살당하자 흩어지고 말았으니 경남 일원을 휩쓸었던 진주의병은 완전히 해산되고 말았다. 삼가 감옥을 빠져 나온 노응규는 10여 명의 의병과 함께 거창으로 향했는데, 부형 역시 안의의 서리배에게 각각 화형과 총살형을 당했다는 비보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상경했다가 전라도로 피신하여 광주·남원 등지를 전전했다.
고종이 아관에서 돌아오자 노응규는 '지부자현소'를 올렸고 정한용은 '사면소'를 올려 각각 비답을 받았다. 이는 진주의병이 독립신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비도'가 아니고 국권회복을 위해 일어선 '의병'이라는 추인이 내린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