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평사(衡平社)와 형평운동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수긍하는 보편적인 원리이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그렇지 못하였다. 신분에 따라 귀한 사람도 있고, 천한 사람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신분은 직업을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일상 생활에서 사람관계를 맺어주는 조건이었다.
조선시대의 신분 위계에서 가장 천한 신분 집단이 백정이었다. 한없이 차별 받으며 억압받던 그들은 그야말로 천민 가운데 천민이었다. 그래서 남들처럼 똑같이 대우받으며 사는 것이 백정들의 소망이었다. 그들의 소망을 모아서 만든 단체가 형평사(衡平社)였다.
형평사는 말 그대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단체'였다. 형평사는 1923년 봄 경남 진주에서 만들어졌다. 기본적으로 백정 차별의 관습을 없애고 평등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을 갖고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형평사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사회운동의 성격이 뚜렷한 형평사의 활동을 우리는 형평운동이라고 부른다.
형평운동의 첫째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서 평등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형평운동은 신분제의 찌꺼기를 없앤다는 과거 유산의 극복 측면에서, 또 평등사회를 향해 나간다는 미래 지향적 측면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 우리 글 신문들은 흔히 농민, 형평, 청년, 여성 순으로 적으면서 형평운동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렇게 1923년 결성된 뒤 1935년에 이름을 '대동사'로 바꿀 때까지 뜻깊은 활동을 벌인 형평사는 일제 침략 35년 동안 단일 조직으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로 기록된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려고 활동한 인권단체로 평가된다.
○ 형평운동사(백정운동)
1923년 4월 24일 진주에서 시작되니 백정 해방의 운동을 '형평운동'이라 일컫는다. 신분 질서가 엄격한 조선 5백년동안 가장 천대 받아온 백정 집단의 인권 존중과 신분 해방을 주창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형평운동은 전통사회에 불평등한 질서를 청산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일어난 자연적인 현상이다.
일제 압제의 35년 동안 전국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이 운동은 훗날 대동사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한 시기를 제외하고 형평사 활동기간(1923∼1935) 만 하더라도, 형평 운동은 이 시기의 어떤 사회운동보다 가장 오랫동안 단일 조직아래 지속되었다. 따라서 그 과정에는 억눌린 민족 상황이 뒤얽혀 작용하였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려는 의지가 담겨 있어 더욱 뜻깊은 운동이다.
망건도 못쓰고, 가죽신도 못 신고, 명주옷을 못 입는 등 옷차림에서부터, 나이 어린 일반인에게 존댓말을 쓰고, 일반인 집에 가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함께 걸을 때는 몇 걸음 뒤쫓아 가는 등 생활 교제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출생하여 호적에 못 올리거나 좋은 이름자를 쓸 수 없는 것에서부터 결혼, 거주, 장례 등에 이르기까지 백정들이 받았던 차별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조선시대에 보편화된 사회관습이었다.
진주 지역은 유교 전통이 강해 백정 차별이 더 심했으리라고 짐작할 수는 있어도, 그런 유교 분위기가 다른 지역에도 강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백정 차별이 진주만의 특성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 진주의 백정들이 더 부유했다는 증거도 없다. 1910년 경남의 경우만 하더라도 동래, 창원, 의령, 거창, 밀양, 울산 등지의 도축 수가 진주보다 많았다. 이런 여러 사항을 고려해 볼때 오히려 진주에서의 형평 운동 발생 조건은 진주 지역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