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우곡 진주정씨 고려정승 정석의 아들이다. 고려말의 문신으로 사헌대부에 벼슬에 올랐다.
이만육이 지은 묘갈에 이르기를 "고려 때에 벼슬길에 올라 사헌대부가 되었으며, 조선 태조가 여러번 벼슬길에 나오기를 불렀으나 청맹이라 핑계하고 끝내 응하지 않으므로 심지어 사신을 보내 솔잎으로 눈에 침을 주어 시험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이야기는 여지지도 기록하고 있다. 사는 곳에 정자와 방형의 못을 파서 정원을 꾸몄으며 또 두어길 되는 담장이 둘러 쳐져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퇴계 이황이 일찍이 이곳을 지나다가 시를 지어 그를 사모하고 생각하는 뜻을 표현바도 있었다.
고목 네 그루가 있는데 그 푸름이 변할 줄 모르고 지금까지 맑은 바람을 사람에게 불어준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 나무들은 그가 손수심은 나무라 전한다고 한다. 포은(정몽주)의 죽음과 야은(길재)의 은둔과 우곡(정온)의 청맹을 중국 은나라의 삼인(三仁)에 비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