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원년(1010) 5월에 원도로 유배되었는데 그 이유인즉 일찍이 유종과 함께 동여진을 치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기로 매양 이를 한되이여겨 오던 유종이 때마침 여진이 95명이 입공차 화주에 내도한 것을 모조리 살해하였던 그 책벌이었다.
한편 강조는 현종을 옹립함에 있어 목종이 스스로 대량원군에 선위하려던 뜻과 달리 사리판단이 어두워 쿠데타로 목종을 폐위 살해했었다. 이 일은 책문을 이유로 제2차 거란내침의 구실이 되었다. 요군은 강조를 사로잡아 남침을 거듭하므로 현종은 앞서 유배했던 하공진을 소환 복직케하고 남으로 몽진 길을 떠났는데 양주에서 뒤쫓아온 공진을 만났다.
그는 왕에 자청해서 고영기와 더불어 적의 군영을 찾아 현종의 친조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철군을 요청하여 마침내 회군시켰다. 적국으로 끌려간 공진은 요왕의 온갖 우대와 회유를 물리치고 환국을 기도타가 일이 탄로나 요왕이 친히 문초하는 자리언만 결코 굴함이 없이 거란을 섬겨 삶을 원치 않는다고 초지를 굽히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죽음을 당하고 배를 갈려 다투어 심간을 씹힌 바 되었다. 현종2년 (1011) 12월 기유날이었다.
이 일을 앞선 강조의 항사와 더불어 고려인의 기백과 민족정신을 꽃다웁게 발로한 그 대표적 예로 꼽아 오는 것이다. 뒤에 고려문종 6년(1502) 3월 그의 충절을 기려 영정을 공신각에 걸고 이들 칙충에게 5품직을 내렸으며 동년 8월 공진의 벼슬을 문하사랑동 중서평장사로 높이고 다시 아들에게 상서공부시랑으로 가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