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목왕 3년(1347)에 나서 조선 태종 16년(1416)에 세상을 뜨신 고려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대림 호는 호정이며 진주하씨 순흥부사 하윤린의 아들이다. 공민왕 14년(1365) 을사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신돈의 비행을 통박하다가 지영주사로 좌천되었고 공민왕 20년(1371) 안렴사 김주가 그의 치적을 제1위로 보고하여 고공좌랑으로 발탁되었다.
그 뒤 여러번 벼슬을 두루거쳐 첨서밀직사사가 되었고 우왕 14년(1388) 최영 장군의 요동공격 계획을 정면으로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되었다. 조선이 개국된 뒤인 태조 2년(1393)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계룡산 도읍을 반대하고 한양 도읍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듬해 첨서중추원사로 옮겨 명나라 태조가 우리나라 태조께서 보낸 표전문이 불손하다 하여 책망 하여왔다. 이글을 지은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 자신이 해명토록 주장하여 한때 정도전과 서로 반목하였다. 태조 5년(1396) 한성부윤으로 있으면서 계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작성의 전말을 소상히 해명하는데 성공했다. 태조 7년(1398)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제1차 왕자의란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에 승진되었고 정사 공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작되었다.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란 때도 이방원을 적극 도왔고 이 해에 명나라 태조가 죽자 진위겸 진향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이듬해 정종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인정 받아냈고 돌아와서는 참찬문하부사에 올랐다. 이어서 판의흥삼군부사를 거쳐 우정승이 되어 진산백에 봉작되었다. 이해에 태종이 임금자리에 오르자 좌명공신 1등으로 뽑혔다. 이듬해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한가하게 쉬었다.
태종 2년(1402)에 좌정승으로 다시 발탁되어 판승추부사를 겸임하였고, 이해에 등극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영락제 성조의 등극을 축하하고 조선 왕조의 완전한 인준을 증표하는 고명인장을 새겨받아 갖고 돌아왔다. 왕명에 따라 동국사략을 이첨과 더불어 편찬 하였으며 태종 9년(1409) 영의정부사가 되어 군정을 개정했으며 영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의 편찬을 총지휘 했다. 태종 12년(1412) 다시 좌의정을 거쳐 태종 16년(1416) 70세 때 관직을 사임했다. 평소의 공으로 진산부원군에 진봉 되었으며 왕명으로 함길도에 있는 태조의 능을 돌보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세상을 뜨셨다. 그는 시문에 능하였고 음양 의술 성경 지리에 정통했었다.
태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태조의 묘정에 뒷날 배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해동명신록에 이르기를 "천자가 중후하고 식명하며 도량이 넓고 단정하고 위곡해서 묘당의 결의 정책에 가모와 밀의에 계욕함이 많았다. " 그는 집에 있을 때 치산하지 않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음양 의술 성경 지리를 모두 그 정미 한데까지 알았으며 예악과 제도를 모두 그가 자세히 정하니 개국문한과 사대사명이 반드시 그의 손을 거쳐서 정해졌다." 하였다. 그의 행장에 따르면 "정승으로서 늙음을 고하고 물러가려 하니 태종 임금께서 만류했으나 한사코 듣지않고 떠나가므로 태종께서 친히 제천정까지 나가 떠나는 그를 전송하는데 술에 취하자 임금이 노래를 지어 그에게 주고 또 손수 교서를 써서 진주의 전세 백결을 하사하여 영세토록 전하게 하니 그는 절하며 이를 받아 물러갔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 성상께서 주신 것을 어찌 감히 사사로이 쓰리오"하고 따로 향사당을 지어 교서를 모셔두고 해마다 받는 전세로 시골의 부로들을 모아 계 닦는 비용으로 쓰게 하였느니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