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라고 하면 이씨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를 점쳐주고 또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괴상하고 해박한 중이였음은 한국의 야사에서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이성계가 등극 후에 산남 지방에 河, 姜등의 인물이 많이 나옴을 싫어하여 무학대사를 시켜 진주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진주성을 살폈으나 그렇게 마음 쓸 곳이 없어 비봉산쪽을 살피니 과연 명당 명승의 자리이며 더욱이 비봉산의 지맥이 대룡골의 황새터와 연결되어 있음에 절로 놀랜 무학대사는 지금의 비봉산과 봉원 초등학교 사이의 가마못이 있는 등을 끊어서 한시름 놓았다.
다시 동쪽을 살피니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비봉루 옆자리에 향교가 엄숙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니 무학대사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였다.
"어쩌면 이 조그마한 비봉산을 둘러싸고 이렇게도 좋은 자리가 많을까? 이 태조가 신기한 사람이 많이 나온 것과 앞으로 나올 것을 염려하고 장차 새로 만든 이씨 조선을 뒤엎을 역적질 할 사람이 나올 땅이라 우려하더니 정말로 그러한 땅이 로고"하여 향교를 옮겨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남쪽을 살피는데 남강하류 새벼리 덤고개 밑에 돌산이 튀어 나왔는데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음에 더욱 놀란 것은 무학대사였다.
지금도 우리들은 석용골이라 부르고 있는 곳이다.
대사는 크게 신음을 하며 "음- 정말 말못할 땅이로구나- 웬 이렇게도 골골 마다 명당자리만 있다니-"하며 인부를 시켜 석용을 파괴하는데 떨어져 나오는 돌마다 하나 하나가 모두 용비늘 같았고 그 용비늘 같은 돌이 떨어져 나올 적마다 붉고 붉은 빨간 피가 흐르는데 이 핏줄기는 의령에 까지 흘러갔다니 전설이란 정말 같은 거짓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이태조는 무학대사를 이렇게 믿었느냐하면 이태조가 일찍이 고려말에 신하로 있을 때 무학대사와 무학대사의 스승인 명승 뇌옹조사가 함께 고려 공민왕을 내어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 이씨조선 500년의 도읍지를 삼게 하고 대한민국의 서울도 되게 하였으니 이태조가 무학대사를 얼마나 믿었는가 상상할 수 있다. 무학대사가 비록 진주의 지맥을 끊기는 하였으나 인물은 여전히 나왔으니 이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곧 태종을 도와 왕위에 앉게 한 '하륜'이며 임진란 때 비록 외지사람이나 주씨 '논개'가 나고, 또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를 만든 '정평구'며 '삼열사' '삼장사'가 있으니 지금도 진주땅의 정기를 받아 우리나라의 지도적 인물에 진주사람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지간에 무학대사가 지맥을 끊은 이후에는 보수안정의 고을로 바뀌었으니 과연 우리는 이 운명적 전설을 따라야 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이 마당에 풍수지리설을 내동댕이치고 발전하는 문화, 예술, 교육도시로 발전함에 모든 시민은 새시대의 새 무학대사가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