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양잡영 12수중 일부분
농가의 8월에는
술 향기 번져나고
가을곡식, 드리운 꽃은
땅에 가득 누르렀네
천고의 영웅들
나라 지킨 이 땅인데
지금에 이르러
투우장이 되었구나.
가을 풀 우거지고 밭갈이 쉬었기로
목동들은 한가 한데
억센 소 힘이 솟아
그 분기 산 같구나.
뒤엉킨 뿔 씨름
다투어 충돌하니
절승한 제군들은
목군을 파하고 돌아오네.
○진주소싸움
1910년 국치를 눈앞에 두고 당시 진주에서 발간되던 유일한 지방지 경남일보 주필 위암 장지연이 경남일보를 통해 발표한 "진양잡영" 12수중 일부분이다.
위암은 자평 하기를 "당지의 투우가 성하여, 천백명의 같은 무리들이 큰 충돌을 벌이면 그 등약하고 포효하는 모습이 진실로 일대 장관이라!."고 하였다.
진주소싸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전쟁에서 승리한 전승기념 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고려 말엽(1200년경)부터 이 곳을 중심으로 자생한 고유 민속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세시풍속기에도 그 기록이 없으니, 언제라고 꼬집을 수 없으나, 다만 농본 중심 생활이었기에 소를 길렀고, 소를 기르면서 소싸움은 있었으니, 진주소싸움의 역사는 실로 오래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추고하면, 고유 민속으로 정착한 "큰 판"은 아니었지만, 봄부터 초가을까지 협의적인 소싸움은 자연발생적으로 있어 왔으며, 소 먹이러 다니는 초동들이 마을의 소끼리 싸움을 붙여 왔고, 나중에는 마을에서 힘센 소를 골라 산등성이나 풀밭, 강변으로 몰고 가 이웃마을 소와 한판 승부를 겨루는, 이른바 마을과 마을이 대항하는 "큰 판"이 있어 왔다. 이렇게 하여 이름 난 소는 추석놀이의 한 주역이 되어 "큰 판"을 이루어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주의 "큰 판"은 "수무바다"라 일컫는 남강백사장이었다. 이 때가 되면 수백개의 차일이 백사장을 온통 수놓았으며, 소 고삐와 코뚜레를 푼 황소와 함께 영웅처럼 입장하는 상머슴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원근에서 모인 군중은 수만명에 이르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옛날의 소싸움은 상머슴의 날이기도 했다. 이것이 나중에는 문중 세력 과시장이 되기도 했고, 또 술과 돈을 건 승부장이 되기도 했다.
싸움에서 이긴소는 목과 뿔을 비단으로 장식하여 상머슴이 등에 오르고 온 마을사람들이 농악을 울리며 시가 퍼레이드를 벌인 뒤 유유히 마을로 돌아가면 마을 잔치로 이어져 축제분위기에 젖었다. 소 값은 부르는 게 값, 팔지도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싸움에 진 소는 소 값이 곤두박질하여 절반이하로 뚝 떨어졌으며, 한번 진 소는 다시 싸움을 않거니와 끝내는 도살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진주소싸움이 벌어지는 며칠동안은 싸움소가 일으킨 뿌연 모래먼지가 백사장을 뒤덮었으며, 수만 군중의 함성은 하늘을 찔렀고, 차일속에 오간 술 바가지로 하여 양조장 술은 동이 났다. 이렇듯 장관을 이뤘던 "진주소싸움"도 시대에 따라 변천하여 소싸움장은 남강백사장에서 공설운동장으로 , 서장대밑 고수부지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경기방법도 현대화하여 백사장에서의 제 맛을 잃었다.
또한 예선이라 할 마을 대항의 순수함도 차츰 퇴색하여 이제는 소싸움도 전문화되었다. 옛날의 경기방법은 소싸움장이 백사장이었기에 소의 크고 작음에 구애되지 않고 그 세기로 한 판 승부를 겨루었지만, 근세에 와서는 소의 중량에 따라 갑, 을, 병으로 나누어 실시하는데 승부 또한 싸움소가 지닌 힘과 뿔 질 여하에 따라 승부가 가름된다.
또 출전을 앞둔 소는 몇 달 전부터 융숭한 미식으로 대접을 받으며 충분한 영양관리를 하며 힘을 기른다. "미련한 소" 라고 하지만 주인의 인내를 받으며 동과 서문으로 출전하는 소는 양쪽 고을사람들의 흥분되니 응원속에 싸움이 시작되는데, 그 기술 또한 다양하여 "뿔걸이"로 승부를 내기도 하고 "옆목치기"와 "들치기"로 상대를 제압한다.
성질 따라 그 기량도 달라 싸움 방법도 각양각색인데, 성질이 급한 소는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싸우는 소가 있는가하면, 상대에게 일단 눈싸움을 걸어 응시하다가 기회를 포착하고는 급소와 허를 찍어 승부를 내는 꾀많은 소도 있다. 이런 경우 대개 앞발이 짧은 소가 유리하다.
뿔과 뿔이 불꽃을 튀길 때 응원자들은 "찍어라", "받아라"하며 열띤 응원으로 소싸움장은 무르익고 소 주인은 소주인대로 소에게 승부수를 요구한다.
그리고 소들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싸움은 불과 몇 분 사이에 끝나기도 하지만, 길게는 2∼3시간이 보통이며 그 밀고 당김으로 드넓은 백사장이나 운동장을 메우니, 장관이라 안 할 수 없다.
승패는 상대편이 싸움을 포기할 때까지 계속되는데 이 때 싸움에 지는 소는 그 동작으로 알 수 있다. 삥 둘러선 군중 속으로 달아날 궁리를 하면 승패가 난 것이지만, 꼬리를 흔들거나 뒷배가 들쭉날쭉 할 때, 똥을 싸거나 입에서 거품을 내뿜는 소는 영락없이 싸움에 지고 만다.
이러한 "진주소싸움"의 그 전성기는 일제 때, 민족의 억압된 울분을 소싸움에서 발산했던 것이다. 왜인들이 진주땅을 들어 설 때, 수만 군중이 백사장을 뒤덮고 시가지를 누비니, 겁에 질린 왜인들이 남강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며칠씩 머물렀다는 이야기는 "진주소싸움"와 더불어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러한 왜인들은 민족혼이 서린 진주 소싸움을 끝내 거부하여 진주소싸움은 산 속으로 숨어드는 비운을 겪었으나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다시 되살아나니, 이 고장에서 해마다 열리는 "전국소싸움대회"야 말로 민속사에 지니는 뜻 또한 실로 크다 하겠다.
이처럼 민속사에 큰 줄기를 이루며 오늘에 이른 진주소싸움에서 소뿔이 빠진 일은 단두차례로, 진주농고의 '맹우'와 의령의 '의용'이었으며 둘 다 1등의 영예의 뿔을 바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