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2월 16일 군립공원으로 지정 (경남고시 제 '93-338호 )된 방어산은 이름 그대로 兵亂(병란)과 왜구를 무찌르고 방어했다는 산이다.
정상에는 城(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墨神佑(묵신우) 장군의 용맹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온다.
장군의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달려 절벽과 골짜기를 날아다니면서 3백 근 짜리 활을 잡아 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중에 兵亂(병란)이 일어나 적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장군은 3천명의 군사와 중 慧聖(혜성)의 도움을 받아 방어산 봉우리에 성을 쌓고 적과 맞섰다. 적은 방어산 맞은편 봉우리에 진을 치고 공격해 왔으나 장군은 성문을 굳게 닫은 채 한 달을 버티다가 적이 지칠 무렵에 火箭(화전)으로 공격, 일시에 적을 무찔럿다. 장군의 공격 지략을 본 적은
"이는 필시 神兵(신병)의 兵術(병술)이다." 며 도주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장군과 중 혜성의 공을 기리기 위해 鐵像(철상)과 鐵馬(철마), 절을 세웠는데 방어산 정상의 북쪽에장군 철상, 동쪽에 望日菴(망일암)이란 절터가 아직도 남아 있고 장군의 軍馬(군마)가 흘린 말굽과 핏자국이 아직도 바위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정상 아래의 馬蹄峴(마제현, 말발굽고개)이란 이름이나 勝禦(승어, 지금의 지수면 승내)등도 모두 방어산에서비롯된 것이다. 실제 방어산에 대한 기록은 고려 때부터 나타난다.
고려 禑王(우왕) 5년(1379) 5월 왜구가 班城(반성)을 거쳐 이 산에 올라 목책을 세우고 진을 쳤다. 이때 上元師(상원사) 禹仁烈(우인열)은 朴景修(박경수), 吳彦(오언)과 더불어 왜구를 포위·공격하여 34급을 베고 산을 탈환, 왜구를 방어했다.
그 해에 왜구는 晋陽(진양)·泗川(사천)·山淸(산청)·咸陽(함양)을 돌며 분탕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