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과 진주성싸움
1592년(선조25년) 10월 5일 김시민 진주목사는 군사 3천8백 여명으로 왜군 2만 여명의 공격을 받아 6일간 싸워 물리치니 행주대첩, 한산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다음해 도요도미히데요시는 지난해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593년(선조26년) 5월 20일 진주성 공략을 다시 명령하였는데 당시 왜군은 12만1천6백 여명이었다.
6월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은 1593년 6월 29일 무너졌으며 이 싸움에서 김천일, 최경희, 황진, 김준민, 고종후, 이종인등 맹장들은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7만여 민·관·군과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
이 때 논개는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절함으로써 민족의 꽃으로 산화하여 만고에 빛날 충절을 남겼다.
○ 임진왜란과 진주성 전투
1592년 임진년 10월 5일 전후 진주성엔 3천 8백 여명의 병력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즈음 2만명에 이르는 왜군은 함안에서 어속령을 넘어 반성창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 선봉부대인 듯한 기마병 1,000여명이 진주동쪽 마현 북봉에 도착하여 진주형세를 정찰한 뒤 검광을 번쩍이면서 종횡무진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때 목사 김시민은 하나의 화살도 헛되어 낭비하지 말라고 명을 내리고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성내 전망이 좋은 곳은 용대기를 세우고 성중에 있는 노약자까지 전원 남장을 시켜 장정처럼 보이게 하였다. 왜적의 대병력 앞에 처한 김시민장군은 최소한의 궁시를 소모하여 최대한의 전과를 올리려고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10월 5일 오후 왜적의 기마 부대는 그들이 경유해 왔던 도로를 따라서 다시 돌아갔다. 김시민은 곧 건장한 장졸들을 선발하여 산에 오르게 해서 진주성 주변의 적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 결과 왜적 수만명이 진주 동방 10리 지점에 있는 임연대 부근에 포진하고 있음을 알고는 수성군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각자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명을 내린다. 이윽고 장군은 10여리 밖에 수만의 왜적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게 되는 한편 홍의장군 곽재우의 막하 심대승 정예군 200여명의 응원군이 진주성 바깥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 받게 된다.
밤이 되자 응원군은 횃불 다섯 개씩을 들고 비봉산에 나타나 호각을 부니 진주성중에서도 함성으로 호응하여 왜적을 대경실색케 한다. 다음날 날이 밝자 목사 김시민은 군관 60여명을 선발하여 교대로 성내를 순찰케 하는 한편 자신도 수시로 순찰하면서 임전태세를 총 점검하였다.
6일 아침부터 왜적은 대탄 쪽에서 3개 부대로 나누어 산야를 뒤덮으면서 진주성을 공략해 왔다, 일대는 진주성 동문 밖 순천당산에서 결진하여 진주성을 굽어 내려보고 있고 일대는 개경원에서 동문 밖을 지나 봉명루 앞까지 열을 지어 결진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왜적은 진주성의 남쪽 남강변과 서쪽을 제외한 동북방을 완전히 포위하여 공격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왜적이 진주성을 향하여 진격해 오는 양상은 형형색색 요란한 모습이었다.
왜적은 3대로 나누어 진주성 외곽에 진을 치고 그밖에 여러 산꼭대기에는 왜적의 병졸로 뒤덮여 있어서 마치 개미떼를 방불케 하였다. 왜장6명은 모두 흑색의 군복을 입고 쌍견마를 탔는데 창과 검을 높이든 자가 전후를 옹립하면서 흰 승복을 입은 여인이 역시 쌍견마를 타고(종자를 많이 거느리고) 왜장의 앞에 섰으며 걸어서 따라가는 여인의 수도 또한 많았다. 이때부터 왜적은 진주성을 향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즉 순천당산에 결진하고 있던 왜적 천 여명이 성중을 향하여 일제히 총을 발사하였는데 그 총성은 마치 우뢰 소리와 같이 요란하였다. 이 때 왜적은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를 보유한 반면 아군은 구식무기인 궁창 이어서 수성군은 군장비 면에서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를 본 김시민은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여 적의 화력 소모를 유도 시켰다.
아군은 왜적의 공세가 약화되자 이를 신호로 왜적에게 대항하였다. 당황한 왜적은 민가 대문의 판자나 목재판을 모아다 흙칠을 하고 성벽 약 백 보쯤 되는 지점에 가지런히 세우곤 뒤에 숨어서 성안을 향하여 조총을 발사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왜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변 민가를 분탕질하고 또 동변의 초가을 철거하여 진주성 인근의 민가는 폐허화되고 말았다. 그들은 또 볏집과 풀을 민가로부터 운반하여 와서 일시에 막사를 세웠는데 그 길이가 6·7리에 연이어 있었고 그 막사에는 모두 청색장막을 둘러쳤다. 또 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하루 종일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왔는데 그 물량은 엄청난 것이었다. 즉 왜적이 우마에 싣고 온 군수물자의 운송행렬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따라서 이들이 통과하는 도로 주변에는 진토로 시야를 흐리게 할 정도였다. 일몰 후 어둠이 깔리려 할 때 왜적은 한 장소에서 호각을 부니 다른 곳에 있던 왜적들이 즉시 호응하여 일제히 함성을 질렀지만 저녁이 되자 조용해졌다. 하지만 야간에는 진주성을 향하여 계속하여 발포하였다.
진주성은 이렇게 왜적의 포위망 속에서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었지만 구원병은 진주에 도착하지 않았다. 목사 김시민은 야음을 틈타 진주성 밖에 있는 감사 김성일에게 사람을 보내 소모된 화살등 주요 물자를 보급 받음으로써 성내 장병들의 사기를 회복시켰다.
성 내외의 내왕이 쉽지 않은 그 상황에서 영리 하경애는 야간을 틈타 긴 활촉 100부를 가지고 무사히 진주성에 전달케 되고 그 때까지 고성에서 활약하고 있던 최강과 이달의 두 의병장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야간을 이용하여, 진주성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에 접한다.
진주에 도착한 의병장 최강의 응원군은 진주성 남쪽에 위치한 망진산정을 점유하고 그 곳에서 진주성을 바라보면서 진주성 안의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병들의 응원작전은 당시 진주성 주변의 상황으로 볼 때 대단히 위험이 따르는 것으로서 진주성에 대한 응원은 용감무쌍한 후원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진주성 주변은 이미 왜적의 대병력이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고 망진산 일대도 왜적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병장 최강 휘하에 있었던 의병들은 야음을 틈타서 망진 산정을 점령함으로써 진주성 안에서 분전하고 있던 장병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성 아래 포진하여 함락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왜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망진산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의병장 최강은 그의 휘하 의병들로 하여금 각자 횃불을 4·5개씩 들게 하여 전후좌우로 진퇴를 거듭하면서 북을 치면서 함성을 지르게 했다. 최강 휘하의 의병들이 이러한 갖가지 형태의 작전을 구사하여 진주성 수성군을 응원한 것은 실제 소수병력으로 몇 배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다. 의병장 이달도 그의 휘하 의병들을 이끌고 두골평에 도착하여, 왜적의 측면을 공격, 많은 왜적을 참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왜적은 7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새없이 조총을 쏘아댔으며 긴화살을 사용하여 진주성을 향해 난사하는 한편 진주성 주변에 있던 민가를 분탕질하여 진주에서 수 십리 안에 있던 일반 주민의 가옥이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 본 김시민 장군은 야간에 악공들로 하여금 문루에 올라가 피리를 불게 하여 성밖 일에는 상관 않는다는 작전을 폈다. 하지만 왜적들은 장죽을 이용한 장편과 죽속등을 구해 성밖에 쌓는 한편 우리의 연소자들을 납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고 8도도 무너졌으니 진주성도 항복하는 것이 좋다'고 큰 소리를 지른다. 왜적의 이 같은 행동에 김시민장군은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했지만 왜적은 이미 만들어 놓은 죽편을 진주성 동문 밖 수백보쯤 되는 곳에 세우고 그 안쪽에 판자를 세우고 속에는 흙과 돌을 쌓아 층루를 언덕과 같이 만들어 그 높이가 성벽의 높이와 같게 하였다. 또 그 위에서 포와 조총으로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아군의 궁시를 피하려고 했다. 다음날도 왜적은 여전히 공격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수천개의 폭 넓은 죽제와 작은 대를 조밀하게 엮어서 그 폭이 한간 정도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 죽제 위에다가 망석으로 덮고 그것을 인차형으로 엮어서 일시에 그 곳으로 기어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층의 산대를 만들고 그 아래에 바퀴를 달아서 자유자재로 이동이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김시민 장군은 현자총으로 왜적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진주성에서는 이 현자총을 발사하여 적진을 세 번이나 관통시켰는데 이때 대를 조성하고 있던 왜적은 전혀 뜻밖의 위력에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 외에도 왜적은 솔 가지를 잘라와 성 둘레에 파 두었던 호를 메우려고 했고, 미리 준비한 죽편을 이용하여 성벽을 기어올라 성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김시민 장군은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지물에 싸 두었던 화약을 송지를 향해 던졌다. 왜적은 오랫동안 준비하였던 많은 송지가 모두 불타버리자 죽편을 운반해 와서 성을 넘으려 했다.
이에 김시민 휘하 수성군은 성상에 설치하여 두었던 비격진천뇌와 질려포등 화포를 발사하여 죽편과 장제를 파괴하고 끓는 물을 붓거나 큰돌을 굴려서 적의 접근을 막았다. 또 왜적이 바퀴를 달아서 굴러다닐 수 있도록 삼층으로 된 산대마저 자루를 길게 부착한 도끼와 낫을 가지고 파괴하였다. 그리고 성내 여자들에게 물을 끓여서 접근해 오는 왜적들에게 쏟아 붓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 장군은 풀숲으로 활을 당기는 모습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사로 위장시키고 화살 대신 투석을 많이 하라고 명을 내리자, 왜적은 성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날 밤에 왜적은 또 많은 죽편을 설치하여 점차로 성에 접근하여 흙을 높이 쌓아 올려 양측에 산대를 만들고 거기에다 4층을 결구하고 그 앞을 판자로 가렸다. 그리하여 수성군의 화살과 투석을 피하고 발포를 서둘 때 고성의 임시 현령 조응도와 진주 복병장 정유경이 군사 500여명을 이끌고 십자형 횃불을 들고 남강 건너편 진현위에 올라가서 호각을 불었다. 이에 수성군들은 응원군이 온 것을 알고 곧 종을 울리면서 호각으로써 응하자 왜적은 크게 놀라 각 막사에 불을 피워 놓고 복병을 강변에 보내 원군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9일 아침 2천 여명의 왜적이 단성방면으로 나아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였다. 그들은 2대로 나누어서 진격하여 갔는데 일대는 단계현에서 합천 임시 의병장 김준민과 격전을 벌였는데 김준민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략으로 대적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대는 살천 방면으로 진격하였으나 정기룡과 조경형이 합세하여 역시 왜적을 격퇴시켰다. 이리하여 합천 살천 방면에서 패전했던 왜적은 석양때에 그들의 본거지인 진주로 귀환하고 말았다. 진주성 밖에 머무르고 있던 잔류 왜적은 진주성을 향하여 종일 발포하는 한편 흙을 옮겨와서 토부를 쌓는 작업도 전에 비해 훨씬 다급하게 하였다. 이 날 왜적들은 진주성 함락을 위해 주변에서 활약하는 의병을 미리 제압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진주성 공격도 아군이 현자총통으로 그들의 방패를 관통시킴으로써 역시 더 이상의 공격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저녁 왜적에게 잡혀갔던 소년이 돌아와서는 '왜적은 내일 새벽 진주성을 총력으로 공격해 올 것이다'라고 했는데 10일 4경 왜적은 각 막사에서 불을 밝혀놓고 우·마에 군장비를 싣고 마치 퇴각하는 것처럼 위장했으나 그들은 곧 모든 불을 끄고 야음을 이용하여 각기 진영으로 몰래 돌아가서 다시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날 왜병은 2대로 나누어 1대는 만여명으로 구성하여 동문 신성으로 진격하여 왔다. 왜장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말을 타고 횡행하면서 장검을 휘둘러 독전하였다. 이 때 목사 김시민은 동문 북격대에서 전투를 총지휘하였고 판관 성수경은 동문 옹성에서 독전하고 있었다. 이 때 수성하고 있던 궁사수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대궁을 쏘았고 진천뢰와 질려포를 발사하는 한편 큰돌을 투척하여 왜적의 접근을 막는가 하면, 화철을 투하하고 불붙은 짚단을 던지며 끓는 물을 성 아래로 쏟아 부었다. 이에 왜적은 능철을 밟아 넘어지는 자, 궁노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 큰돌에 맞아 머리가 깨어지는 자, 열탕 물을 덮어쓰고 머리와 얼굴에 화상을 입는 자 등 부지기수였다.
성동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또 왜군 만여명은 야음을 틈타 구북문 밖까지 돌격하여 왔다. 그들은 장제를 소지하거나 방패를 메고 와서 성벽을 넘으려고 하였다. 갑작스런 왜적의 습격을 받자 수성군들은 모두 놀라 도망가려 했지만 전만호 최덕양과 군관 이납·윤충복은 죽음을 무릅쓰고 맞붙어 싸우자 달아났던 병졸들이 다시 모여들어 동문 옹성과 마찬가지로 왜적을 막았다. 뿐만 아니라 노약한 사람들까지 가세하여 대소 와석과 짚단에 불붙여 던져 성내에 있던 와석과 짚단은 거의 바닥이 나고 말았다.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왜적의 공격기세는 점차 약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 때 목사 김시민은 왜적이 발사한 총탄에 좌측 이마를 맞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곤양 군수 이광악은 목사를 대신하여 북격대를 맡아 작전지휘를 하였다. 그가 데리고 참전한 수하병 100여명을 제1선에 투입시키고 강궁수로 하여금 대궁을 휘어서 일시에 쏘니 그 중의 한 화살을 쌍견마을 타고 고함을 지르던 적장 장강충흥의 실제인 장강현번지윤이라는 자의 흉부를 뚫어 즉사하게 했다.
이 날 전투는 밤 4경부터 시작되어 사시까지 계속되었는데 해가 뜨면서 암운이 하늘을 뒤덮고 뒤이어 뇌우가 쏟아져 천지가 캄캄하였으니 피아의 인마·총성·호각소리만 요란하였다.
이때에 적진의 영막에서 불길이 일어났고 이것을 신호로 하여 왜적은 비로소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동문 신성 밖 격전장에는 인마의 시체가 쌓여서 언덕을 이루었고 그 중의 일부는 왜적이 끌어가서 민가를 태우고 그 열화 속에 집어넣고 도망쳤는데 적장의 시체만은 자루에 넣어 가지고 달아났다. 성안의 수성군들은 이미 힘이 다하였으며 또한 원병도 없었으므로 대규모의 추격을 하지 못하고 오직 일부 병력이 소촌역 까지 진격하여 왜적 30여명의 머리를 베는데 그치고 말았다.
일단 왜적이 퇴각하자 김성일은 성에 들어가 부상당한 목사 김시민을 위로하고 김해부사 서예원으로 가목사를 삼아 대신 성안을 다스리게 했다. 진주성대첩은 임진3대첩의 하나로 왜적의 사망자는 장관이 300명 병사가 만명이라 하지만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김시민 장군은 병상에 있으면서도 계속 나라일을 염려하였고 때때로 북향하여 눈물을 흘렸지만 끝내는 진중에서 순국하고 만다.
○ 왜병의 2차 진주성 공략
진주성은 임진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에 걸쳐 왜장 장곡천 수일·장강충흥·목촌중자 등 약2만여 병력으로 총공세를 폈다가 실패 한 곳이었다. 왜적이 집요하게 진주성을 공략하고자 한 요인은 호남으로 통하는 활로를 트기 위함도 포함시키고 있었다.
이듬해 영남일대의 왜군 10만은 함안·반성·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에 다시 나섰다. 적세가 막강하다는 소문을 들은 조선군이 전의를 잃고 흩어지자 진주성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진주성은 고립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유정이 대구에서 합천으로 오유충이 서산에서 초계로, 조승훈과 이령이 거창에서 함양으로 전진하고 있었으나 진주성 전투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실제로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주역 김천일이 남하하는 왜군을 추격하면서 진주는 곡창인 호남으로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란 점을 강조하지만 소용없었다. 순변사 이빈, 의병장 곽재우, 좌의병장 임계영은 각각 단성현을 거쳐 서쪽 소음으로 또는 사천현에서 호남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거제현령 김준민과 김해부사 이승인은 먼저 입성해 버렸다. 뒤이어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희, 복수의병장 고종후, 사천현감(좌의 병부장) 장윤, 의병장 변사정이 파견한 그의 부장 이잠, 의병장 민여운 등이 김천일을 따라 입성하였을 뿐이다. 이에 김천일은 성중의 창곡을 점검한 뒤 분군·분수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6월19일 전라병사 선거이와 경기조방장 홍계남이 군사를 이끌고 진주에 왔다가 '군세의 많고 적음이 현격하니 물러 나와 다른 곳을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여 퇴군할 것을 권하자, 김천일이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그들은 군사를 거두어 출성하여 이빈 등과 함께 함양 쪽으로 물러가고 말았다.
한편 이와 같이 어렵고 위급한 상황에서 대전을 눈앞에 둔 진주성내의 상황은 목사 서예원이 김해부사로 있을 때에 왜군이 밀려오자 성을 버리고 달아난 데다 진주성 2차 전투가 있기 전 판관 성수경과 함께 명군의 지지차사원으로 상주에 나가 있다가 왜군이 진주로 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장황히 돌아온 지가 겨우 며칠 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해부사 이승인이 그와 더불어 수성문제를 상의할 때 그는 이미 성을 버릴 생각이었다. 평소 겁이 많았던 그는 이승인의 위협 때문에 마지못하여 성안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었으니 대전을 목전에 둔 성주로서의 면모와 역량은 거의 찾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김천일이 도절제의 임무를 띄고 장윤으로 하여금 서예원을 대신하여 가목사의 직책을 맡게 하였다. 김천일을 따라 입성한 병력은 약 3,000여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진주성에 포진하고 있던 병력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호남절의사"에 보면 김천일과 함께 입성한 병력과 제수령병 및 본주병 거기에다 민간인 피난 자녀까지 모두 합하여 6만∼7만 이었다고 적혀 있으나 실제로 이 전투에서 수성군의 사망자 수는 당시 경상우감사 김륵의 보고에 천명으로 나타나듯 김천일을 따라 입성한 3천 여명의 군사 중 사망한 숫자라 보고 있지만 당시 진주성 전투의 병력은 6만∼7만이라고 적고는 있으나 약 2만∼3만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2만∼3만의 병력으로서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약10만 병력의 왜병을 상대한 제2차 진주성 전투의 결과는 미리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이와 같은 전력상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조·명 군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당시 여러 가지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사년 6월 19일 왜적이 작전을 개시하면서 동 월 29일에 이르기까지 11일간 주야를 가리지 않고 피비린내 나는 대공방전이 왜적과 우리 관·의병 사이에 전개되었다.
전군은 작전 개시일인 6월 19일 의령현에서 진주성으로 기치를 휘날리면서 진격하여 왔는데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것이 계사 진주성전투 시발점이었다. 아군은 척후장 이하 정병을 뽑아서 단성현과 삼가현 방면에 보내어 적정을 수색케 하는 한편 복병장 이하 용졸을 보내어 곤양현과 사천현 방면에서 적이 우회하여 오는 길을 막도록 하였다. 이 날 적정을 탐색하고 적의 진로를 차단하는 전략에 의해 응전 태세를 가다듬었던 것이다.
6월 20일 복수의병장 오유와 적개의병장 이잠 등 두 장수는 진주 무사 정국상과 같이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출성하였는데 적선봉 2백여기는 이미 주 동북쪽 산상에 출몰하였고 또 일부는 직접 마현봉상에서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 본 무인 정국상은 귀성하여 '두 장수는 필시 적을 보고 도망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 두 장수는 적 수명의 수급을 허리와 말안장에 매어 달고 귀성하여 성중 장병들의 사기를 충전케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총병 왕필적은 감탄하여 성중의 상황을 알려 구원병을 파견케 하겠다고 약속하고 상주목사 정기룡과 같이 돌아갔다.
사실 왕필적은 처음 입성했을 때 적의 군세에 위축되어 원병파견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복수의병장 오유와 적개의병장 이잠 등이 예상을 뒤엎고 오히려 적의 수급을 배어 개선 귀성하게 된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고 나아가 원병을 파견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돌아갔다. 그러나 왕필적의 이 원병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김천일은 그의 막하에 있는 공조좌랑 양산수와 흥함 등에게 복수의병장 고종후가 작성한 원병요청서를 휴대하도록 하여 총병 유정에게 밀파하였으나 유정이 이를 외면하자 유정의 태도를 본 홍함은 양산수를 버리고 홀로 도망쳤고 양산수는 홍함의 비굴함을 탄식하면서 단기로 헤치며 입성했다.
6월22일부터 29일까지 8일간 혈전을 벌일 동안 왜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을 간추려 보면 6월 22일 오전10부 경부터 3차례 적군의 침략이 있었고 주간 3전3퇴 야간 4전4퇴의 격전을 벌였다.
이때에 고성 의병장 최강·이달은 진주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적세가 너무 강해 손을 쓰지 못하고 다시 고성으로 돌아가다가 함안의 피난민으로 최강을 따라 왔던 3백 여명이 적에게 포위되자 말을 달려 적중에 뛰어 들어 적병과 격전하여 이들은 무사히 구해낸다.
어쨌든 이러한 고성 의병장 최강의 구원시도가 계사 진주성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그 발상은 이 전투 이전에 곽재우에 의해 제시된 게릴라적 유격전 및 측면공격을 통한 협공전략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제독 이여송은 참장 낙상지, 유격장 송대빈 등을 시켜 호남을 출발 진주를 구원하게 하는 한편 영남에 머물고 있는 총병 유정, 절장 오유충을 시켜 힘을 합하여 구원하도록 하였으나 왜적의 세력을 대적할 수 없다하여 모두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다.
6월 24일 적이 병력 5·6천명을 추가하여 마현에 진을 치고 또 5·6백명을 보태어 동변에 진을 쳤다. 이 날도 격전으로 성내 외에 피아간의 전사자 수는 부지기수였다. 이 날의 전투에서 특징적인 것은 왜군이 '귀갑차'라는 것을 만들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 차는 튼튼한 나무궤를 사륜차 위에 올려놓고 군사 몇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서 손으로 사륜차를 앞으로 추진시키고 강색을 뒤에서 당겨 후퇴시키는 장치였는데 가등청정과 흑전장정이 서로 의논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 차는 궤짝 정상부가 귀갑같이 구부러져 있었으므로 귀갑차라고 불리 워 졌던 것이다.
6월25일의 전투양상은『선조실록』에 잘 나타나 있듯 왜적은 동문밖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서 성중을 내려다보면서 총포를 비 오듯 쏟아 부었다. 이러한 왜적의 새로운 작전·전략에 대하여 수성군도 충청병사 황진이 직접 지휘하여 성내에서도 대좌 지점에 역시 동일한 토산을 만들어 이에 응전 하기로 하고 황진 자신도 의립을 벗어 던지고 몸소 돌을 지니 성중 남녀들이 모두 감격하여 힘을 다해 하룻밤 사이에 그 공사를 끝마치게 되었다. 이렇게 신축된 고부에서 현자포를 발사하여 적굴을 깨뜨렸는데 적은 다시 이를 개조하였다.
이날 왜군이 주간에 3전3퇴, 야간에는 4전4퇴하는 사이에 김천일은 명군과 관군측에 구원특사를 보냈으나 한 사람의 원군도 이르지 않았다. 6월 26일 적은 목궤를 만들어 생피로 덮어 싸고 이를 각자가 머리에 이고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성을 헐려고 하자 성안에서는 큰돌을 굴러 내리면서 화살을 비 오듯이 쏘니 적은 또 다시 물러갔다. 적은 또 동문 밖에다 큰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판옥을 설치하여 성안을 향하여 화전을 쏘아서 방화하자 성내의 초옥 들이 일시에 다 타버리게 되었는데 이에 맞서 황진도 건목설판하여 총포로써 적을 저지하였다.
한편 진주목사 서예원은 이 날도 겁에 질려서 어찌할 줄 모르므로 김천일은 서예원 대신 사천현감 장윤을 가목사로 삼아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장병들은 연일 계속되는 격정에 시달린 터에 연일 폭우가 쏟아져 활줄이 모두 풀어짐으로써 제대로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적들은 전단을 통해 항복을 종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 때 성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 적병들이 이 틈을 타서 올라왔는데 김준민이 이를 막으려 하다가 전사하였다.
6월27일 적이 동·서 양쪽 성문 밖에 다섯 개의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대쪽을 연결하여 방책을 만들어 성중을 굽어보면서 끊임없이 총탄을 발사하여 성중에 전사자가 3백 여명이나 되었다. 또한 왜적은 대궤로 사륜차를 만들어 그 위에 적병 수십 명을 싣고 각자가 철갑을 쓰고 궤를 밀어서 성벽 아래까지 침입하여 철추로 성벽에 돌입할 구멍을 뚫었다. 적은 외부에서의 공격만으로는 성을 함락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판단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략상 성기층을 굴착하여 성벽을 붕괴시켜 함락코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에 성벽이 붕괴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 날 전투에서 김해부사 이종인이 적병 5명을 죽이자 왜적은 모두 달아나 버렸으며 또한 성중에서 섶을 묶어서 기름을 묻힌 뒤에 불을 붙여 일시에 투하하여 귀갑차는 모두 타버리고 궤중의 적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초저녁에 적이 또 신화문을 침입하였으나 이종인이 물리쳤다.
이 날 적진에서는 성중에 투서하여 항복을 종용하는 심리전을 펴기도 하였고 또한 표의병부장 강희보는 역전 끝에 전사하였다.
6월 28일 진주목사 서예원의 불찰로 그의 담당지역이 야간을 틈타서 적병에 의해 거의 뚫린 상태가 되었다. 여명에 그 곳을 통해 적병이 집중공격을 해왔으나 황진·이종인을 선두로 한 성중인이 선전하여 격퇴 시켰다. 그러나 이 날 성하에 잠복한 적병에 의해 황진이 전사하여 성중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면서 수성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6월29일 진주목사 서예원으로 하여금 충청병사 황진에 대신하여 수성장을 삼았으나 서예원이 그직을 감당할 수 없어 사천현감 장윤으로 하여금 그직을 대신케 하였으나 그 또한 곧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성중의 지휘체제가 무너지면서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오후 들어 성 동문이 폭우로 무너지자 적병이 개미떼처럼 몰려오므로 이를 물리쳤다. 다시 서북문을 향하여 적이 돌진하자 창의사 김천일도 중과부적으로 궤산하여 모두 촉석루 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적병은 드디어 성에 진입하였다. 이에 진주목사 서예원은 달아났으며 일반 군사들도 적세에 밀려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진주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 날 전투에서 이종인·이잠·강희진·오유 등이 전사하였고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고종후·양산수 등은 남강에 투신자결 하였다.
진주성을 함락한 왜적은 본성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 이 때에 죽은 자가 6∼7만이나 되었다. 후일 김륵이 사근찰방 이잠으로 하여금 일대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성중의 시체는 1천여 구로 촉석루에서부터 남강 북 안에 이르기까지 서로 겹쳐 있었고 청천강으로부터 옥봉에 이르는 5리 사이에도 강의 위아래에 가득했다. 정말 처절한 진주성의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