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갑오년(1894)에 있은 동학운동당시, 동학군과 일군만의 격전이 있었던 곳은 진주지역과 하동지역 뿐으로 전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이었던 곳은 고승당산전투로 알려지고 있다.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와 북방리에 걸쳐 소재하고 있는 이 고승당산은 속칭 고시랑산, 일명 고성산이라 하고 그 산정의 석루를 고성산성이라고 한다. 이 고승당산은 하동군에 속해있으나 동학운동 때 진주목 북평면, 그 다음 해에 있은 을미개혁 이후 진주군 북평면이었다. 그래서 진주를 중심으로 서부경남에서 동원된 동학농민군을 「진주동학군」이라고 말한다.
동학은 서교·서학에 대한 대칭이다. 아울러 동학은 '제폭구민'·'보국안민'·'척양척왜'를 그 이념으로 하는 민족운동이었다.
이 같은 동학사상은 조선조 철종 11년(1860) 경주의 최제우(천도교 제1세 교주)가 동방에 근원을 둔 '유·불·선' 삼교를 합일하여 창도한 것으로 동학은 불과 3, 4년 사이에 경상·충청·강원도 등 하삼도는 물론, 멀리는 경기도 지방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파되어 그 신도 수는 3천 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고성접주에 성한서, 울산접주에 서군효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경남지역에도 상당한 세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당시 최제우는 「천도는 유불선이 아니로되 유불선은 천도의 한 부분」이라 하고 「유의 윤이와 불의 각성과 선의 양기는 인간성의 자연한 품부이며 천도의 고유한 부분이니 오도는 무극대원」하다는「인내천」을 주창하여「도는 천도」라 하고「학은 동학」이라고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최제우는 조정에 의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고종 1년(1864) 3월 10일 처형되고 만다. 하지만 뒤를 이어 최시형이 제2세 동학교주로 등장한다. 그는 그의 제자 손병희(제3세 교주)와 더불어 동학을 은밀히 전도함으로써 동학은 전국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이 동학은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어 소수 특권계급에 의한 탄압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시 척족 세도에 의해 대원군이 실각(1873)된 후 왜적의 침략, 청국의 간섭,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 등으로 인하여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등 불상사가 계속 연발하여 국위는 날로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민씨 일당에 의한 매관매직과 지방관리에 의한 가렴주구, 또한 양반들에 의한 토색질 등으로 내정은 극도로 부패되고 인민은 도탄에서 헤매게 되었다.
이에 동학교주 최시형이 크게 분개하여 고종 30년(1893) 정월 교도들을 충청도 보은군 장내마을로 모아 동학대회를 열고 2월에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도리어 2월 26일에 동학을 금하고 그 괴수를 잡으라는 엄명이 내린다.
그러나 최시형은「제폭구민」과「척양척왜」를 부르짖고 3월 10일 다시 수만명의 교도들을 소집하여 산하에 석성을 쌓고 조정에 대항하였다. 이에 충청감사 조병식이 여러번 해산을 명하였으나 날마다 수많은 교도가 운집하여 형세가 매우 위험하므로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파견하여 민폐시정을 약속하고 동학과 인민을 탐획한 충청감사 조병식과 그를 방조한 공주영장 윤영기 등 수명의 탐관을 처벌함으로써 보은 장내취회는 20여일 후인 4월 2일부터 해산하게 된다. 한데, 이때 장내 취회시 서부경남에서도 상당한 인원이 참가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른바 9월 재봉기가 일어날 때 진주에서도 호남·호서지방과 동시에 봉기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주초차괘방(晋州初次掛榜)의 이 통문 내용을 보면 이는 일종의 동원령 같은 것으로 73개 면의 이수에게 보낸 것으로 보아 1천 여명의 군중대회를 열어 국가의 안위에 대해 그 방도를 강구했던 것으로 짐작되고 또 이 때의 진주지역 동학세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평거 광탄진에서 열린 초8일의 군중대회는 계획대로 개최되어 그 여세로서 시내로 들어와 진주성을 점령했다. 이 때 진주병사 민준호는 이에 오히려 부하들을 거느려 친히 동학군들을 맞아 주었다.
일제가 을미왜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어 부왜 내각으로 하여금 단발령을 내리게 하자, 국수 보복·국권회복을 부르짖는 의병의 봉기는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