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독립운동
진주는 서울과 거리가 먼데다가 도청소재지이므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 3월 3일에 독립선언문을 입수했으나 김천까지 기차로 온 뒤 버스 편으로 합천에 내려 걸어서 진주에 들어 왔기 때문에 3월 18일에야 거사를 했는데 주동자들은 이미 예비 구금되어 있었던 터여서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8일부터 21까지 4일간은 읍내, 22일은 수곡면 창촌리, 25일과 31일은 문산면 소문리, 4월 3일에는 반성면 창촌리, 4월 18일에는 또 읍내등 모두 4개소에서 9회에 걸쳐 일어났는데 특히 기생과 걸인들까지도 합세한 점이 진주 3·1운동의 특징이다.
○ 3.1 운동사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군은 신사참배의 강요, 언론의 폐쇄, 종교의 탄압, 패검한 군대식제복의 학교선생, 태형의 집행 등 그들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하기 10년이 되려는 무렵인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이 있었고 파고다공원에서는 독립요구의 시위가 계속되었다.
특히 3월 3일에 있은 광무제(고종황제)의 국장일을 계기하여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고, 이에 진주에서는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회에 가까운 시위에 3만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즉 조선헌병대사령부에서는 기록한 당년 3∼4월에 있은 『조선소요사건상황』의 경상남도편에 의하면 진주군 내에서는 3월 18일에 약4천명의 군중시위가 있었고 계속하여 19·20일은 시내에서, 22일은 수곡면 창촌리, 25일과 31일은 문산면 소문리, 4월 3일은 일반성면 창촌리에서 있었으며 4월 18일에는 소요사건의 호송피고인을 탈환코자하는 것을 발포하여 해산시키는 등 4개소에서 9회의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경상남도 경찰부의 고등경찰이 작성한 『고등경찰관계적록』에 의하면 박진환, 이광우, 이창대, 강상호, 박용근등 주모자는 3월 18일 진주장날 교회의 정오 종소리를 신호로 약 1만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므로 진주서원·경찰부원·헌병대원·소방조등이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급 300여명을 검거했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진주에서는 5월까지 이어진 시위에서 노동독립대, 걸인독립대, 기생독립단 등의 많은 시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