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0년(1410)에 나서 세조 7년(1461)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자장이며, 진주강씨 강우덕의 아들이다. 세종 11년(1429)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벼슬을 두루 거쳐 세종 30년(1448) 지승정원사가 되었고, 문종 2년(1452) 도승지, 단종 1년(1453)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좌익공신 2등에 뽑혀 진산부원군에 봉작 되었다. 그 뒤 좌참찬을 거쳐 세조 3년(1457)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등극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좌의정이 되었고, 세조 5년(1459)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너그러우며 또한 강직, 근엄하여 대신의 기품이 있었고 타고난 바탕이 체격이 크고 훌륭하였으며, 의례와 법도에 밝았다. 빈례와 제례의 큰 예식이 있을 때마다 임금께서 반드시 그로 하여금 빈객을 맞이하게 하니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황희가 정승이 되었을 때 요좌가 되었는데 황희가 말하기를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그대는 큰 그릇이니 10년 못가서 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임금께서 그의 집에 순행하여 집의 기둥이 섞었음을 보고 놀라 급히 수리케 하였으니 그의 청백함을 가히 짐작할만 하다. 이계전이 연경에 갔을 때 그곳 주객랑중이 일찍 조회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이 계전이 대단히 곤란하여 목은 이 색의 글 가운데서 "조조 대명궁"이라는 시의 글귀를 써서 보였더니 주객랑중이 크게 칭찬을 하였다. 그 뒤에 그가 연경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이계전이 그를 회롱하기를 "중국 선비들이 글을 시험하면 그대는 어찌 하려는고"하니, 그는 곧 그 말을 받아 "우리집에도 통정집(그의 조부 강회백의 문집)이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하였더니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 하였다. 이는 이계전이 자기 글이 아닌 윗대 할아버지의 글을 제글처럼 써 먹은 것을 빈정댄 것이다. 시호는 문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