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5년(1433)에 나서 연산군 11년(1505)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우인, 호는 소요당이며 진주강씨 광양 현감 강행 아들이다. 단종 1년(1453)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예종 1년(1469)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저작이 되었다. 성종 7년(1476) 전적을 거쳐 오랫동안 양사의 언관을 지내다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자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저술과 독서로 보냈다. 조계원이 지은 그의 묘갈에서 이르기를 "그는 자질과 품성이 이미 고명하였고, 학술이 또한 참다움을 얻어서 정자와 주자로서 중심을 삼고 성과 경으로 돌아가 지절을 삼으니 평생 제행한 높음이 진실로 일세의 큰 선비였다. 그의 문장은 조회에 얽매이지 않고 더욱 시에 능해서 한 때 사단의 주맹이 되니 배움길에 있는 자들이 서로 사모하여 원근에서 모여들어 재주에 따라 가르침을 받아 각각 성취하였으니 관포 어득강 초계군수 김수돈 교리 이적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 나왔고 그 나머지 근행한 선비들이 또한 많으니 한때의 현송하는 성함을 정강성에게 견주었다"하였다. 뒷날 예조판서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