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등의 연원

진주성 남강에 유등(流燈)을 띄우는 유등놀이는 임진왜란 진주성전투에서 비롯되었다. 1592년 10월 3,800여 명의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수성군으로 2만여 명의 왜군을 상대하여 물리친 일은 임진왜란 3대첩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때 진주성에서는 성 밖의 의병(義兵) 등 지원군과 연락하기 위해 혹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풍등(風燈)을 올리기도 했으며, 남강에 등불을 띄우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풍등과 유등은 군사적인 신호와 전술로 쓰임은 물론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쓰였던 것이다.

진주대첩을 거둔 이듬해인 1593년 6월에 진주성은 10만 왜군에 점령당했다. 현재까지 진주사람들은 이 일을 계사순의(癸巳殉義)로 기리고 있다. 계사순의 이후로는 당시 순절한 7만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유등을 띄웠다. 이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오늘의 유등축제로 자리 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