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고 박생광(1904~1985)은 경남 진주 망경동 1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기준은 동학교도로 농민항쟁이 실패하자 진주로 박해를 피해 정착하였고, 박생광은 망경동 강가 움막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학창시절을 진주에서 보냈다.1920년 17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해방될 때까지 그 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2004년 박생광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행사들이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현대화랑, 부산시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진주문화예술회관 등 여러 전시장에서 열렸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은 언제 그랬는지, 박생광은 우리 곁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이곳 진주에서 만큼은 그의 예술혼과 그가 표현하는 민족혼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100주년이 15년 지난 이즈음에 그를 다시 만나고자 한다. 개천예술제와 유등 축제가 한창인 2018년 10월 박생광을 만날 준비를 시작하였다. 개천예술제는 박생광을 비롯한 설창수, 오제봉, 조영제, 홍영표 등 진주지역의 예술인이 힘을 모아 시작된 영남예술제가 그 효시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종합예술축제였다. 그렇게 박생광은 사람들을 모았고 진주를 사랑했으며 사람을 중하게 여겼던 인사였다. 그래서 그를 중심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대안동 216번지” 청동다방으로 예술인들이 하나 둘 모였고 그 모인 인사들은 문화건설대라는 조직으로 광복이후 올바른 민족사관의 수립에 기여하여 민족의 문화발전에 이바지하고자 다방에서 세월을 보내지 않고 20년을 한 결 같이 이 예술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를 홍보하였고,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 팔도에서 10월이면 진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그 결과로 박생광의 작품에서 제주도 풍경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1년 백상기념관에서 있었던 개인전을 관람했던 미술사가인 김원룡교수는 ‘박생광의 작품과의 대면은 백상기념관에서의 전시회가 처음 이었지만 그 강렬한 개성과 순수한 예술가적 경지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 초면의 노화백과 잠시의 대화를 가져보았다. 박생광은 화가로서의 수련과 편력을 일본에서 받고 밟았다. 그리고 일본화단에서 확고한 자리도 잡았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일본화가로 되지 않았고 고국에 대한 끊임없는 향수와 작가로서의 정신순화에 정진하여 새로운 양식의 한국화가로서 독특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그의 그림은 묵화에서도 대담한 필치와 세부생략으로 감정의 표현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그의 근작들은 구성요소의 해체와 원근법 무시를 통해서 강한 추상주의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그것이 한국적인 주제, 색상, 형태의 기묘한 변형과 에그조틱한 장식성의 가미로써 새로운 진채화를 성립시켰다고 하겠다. 이 새 양식의 바탕에는 고구려의 고분벽화, 이조의 단청, 그리고 나전칠기 문양 등 우리 전통예술의 철학이 깔리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박생광 화백은 새로운 한국화를 수립하였다. 전통적인 한국화 세계에서 구도자적 정신정과 이국적 장식성을 융화시켜 새롭고 개성있는 박생광 양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구려에서 출발하면서 당 양식을 가미해 새로운 국제화로 발전한 일본 고송 고분벽화의 경우와 같다. 이 박생광 회화의 경지를 우리는 보다 더 이해하고 음미하고 그는 우리 화단에서의 위치와 의의를 진지하게 평가하고 인식할 필요를 절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