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 장군 유품은 박진영(朴震英) 장군(將軍)이 평소 사용하던 유품과 명(明)나라의 제독(提督)으로부터 받은 장려패문(奬勵牌文) 등과 관련된 문헌이다. 박진영관련 교지, 교첩,
박진영 장군 유품은 박진영(朴震英) 장군(將軍)이 평소 사용하던 유품과 명(明)나라의 제독(提督)으로부터 받은 장려패문(奬勵牌文) 등과 관련된 문헌이다. 박진영관련 교지, 교첩, 유지, 유서, 전령, 분재기. 호패, 옥로, 갓끈, 관자, 흉배, 박씨가문의 호구단자, 고목, 입안, 소지, 통문, 완문, 수표, 상서, 상언, 상소, 등장, 발괄, 명문, 관혼상제와 관련된 문헌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겪은 무신과 그 가문이 살아온 과정을 알 수 있게 하는 다양한 문서를 통하여 조선시대 사회상을 알 수 있어서 조선시대 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박진영의 후손이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 소재 박진영 재각의 유물관에 소장하여 오다가 2005년 10월 6일 국립진주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하여 현재는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진영(朴震英:1569∼1641) 장군은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의 장군으로 자(字)는 당재(棠哉), 호(號)는 광서(匡西)로서 박오(朴旿)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식견이 남달랐고 기개 또한 대단하였다.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창의(倡義)의 길에 나서 군수(郡守) 유숭인(柳崇仁)과 함께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무찔렀다.
선조 32년(1599)에 용궁(龍宮) 현감(縣監)에 임명되었고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는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에 제수(除授)되었다. 이때 장군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우리 동포를 많이 귀환시켰으며 이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다. 인조(仁祖)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막하에 종군하여 동교(東郊)에서 대승하였다. 전공에 비해 상은 작은 편이었으나 오직 충절로 불평하지 않았다. 이어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겸 해서방어사(海西防禦使)가 되었으나 곧 귀향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굴욕적으로 항복한 것을 비분강개하다가 인조 19년(1641) 73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