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1593년)에서 성이 함락되어 7만의 민·관·군이 순절(殉節)하자, 의암(義巖)에서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든 논개(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1593년)에서 성이 함락되어 7만의 민·관·군이 순절(殉節)하자, 의암(義巖)에서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든 논개(論介, ?~1593)의 사적을 기록한 비이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 경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진주 사람들은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다 ‘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그러나 지역민들의 이러한 노력과 달리 임진왜란 때의 충신·효자·열녀를 선정해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사적이 빠져있다. 이는 그녀가 천한 기생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편찬자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진주 지역 사람들은 진주성이 함락된 날에 제단(祭壇)을 마련하여 논개의 혼(魂)을 달래는 한편, 논개의 충절을 인정해 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였다. 그리고 경종 2년(1722)에 명암 정식이 『어우야담』의 내용을 바탕으로 비문을 지어 이 사적비를 세웠다.
또 영조 17년(1741)에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남덕하(南德夏)가 왕의 특명을 받아 비각(碑閣)을 세우고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이로써 논개는 국가로부터 ‘의로운 기생’〔義妓〕으로 그 공훈을 인정받았다.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이나 논개의 순국 사적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