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우왕 2년(1376)에 나서 조선 단종 1년(1453)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연양, 호는 경재 혹은 신희옹이며, 진주하씨 부윤 하자종의 아들이다.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태조 5년(1396) 사마양시에 급제하였고 같은 해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록사를 거쳐 직예문관, 춘추관, 순찬관이 되었고, 집의, 동부대언, 주서, 지신사, 예조참판을 두루 거쳐 세종 5년(1423) 대사헌으로서 조계종등 불교의 7개 종파를 선, 교 2종으로 통폐합 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사사 및 사전을 줄일 것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케 하였다.
세종 7년 (1425)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예조참판, 다시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한 때 천안에 유배되기도 했다. 다시 병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세종 13년(1431) 대제학을 지내고 대사헌 형조판서에 올랐고 다시 우참찬이 되어 판이조사를 겸임하였다. 세종 27년(1445) 좌찬성에 올라 70고령으로 임금께서 게장을 내리셨고,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세종 31년(1449) 영의정이 되었다. 문종 1년(1451)에 문종께서 대자암을 크게 고치려고 할 때 이를 적극 반대하고 벼슬을 사임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효이다. 강희맹이 지은 그의 행장에 이르기를 "태종 17년(1417)에 대언에 발탁되자 임금이 그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경은 지금 이 벼슬에 오른 이유를 아는가, 지난번에 경이 대각에 있을 때 혼자 소를 올리며 헌신의 직무를 다하고 있었으므로 내가이로써 경을 알게 되었느니라"하였다. 세종께서 임금자리를 문종에게 양위하자 도승지가 되었다.
그는 양궁을 잘 수선하며 근신하니 군신의 의가 돈독하였으며, 임금께서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는데 혼동없이 편리하였다. 세종 2년(1420) 차자를 올려 그에게 내리는 금은대를 사양했다. 뒤에 대사헌이 되어 탐음한 사대부들을 탄핵하고, 또한 승려들을 몰아 내자고 상소하여 서울에 두곳 각 도에 한곳 혹은 두곳에만 사찰을 두고, 또한 승과를 설치하여 승직을 내리는 법을 없애게 하였다. 이로 인해 조계종과 화엄종 두 종파를 만들고, 서울 밖에는 30사만 두기로 했었다. 일찍이 포은 정몽주의 문하에 들어가 정도를 붙들고 사문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본분으로 여겼다. 그는 시가 기고하고, 필법이 준경하였으니 호정 하륜이 매양 그 일세의 보완임을 칭탄하였다. 그의 병이 위중하자 문종께서 가서 문병하고 남은 국사를 물었으며 세상을 뜨자 그를 위해 사제하고 관원들로 하여금 성대히 호상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