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30년(1597)에 나서 효종 9년(1658)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진백, 호는 태계이며 진주하씨 대사관 하결의 후손이다. 영남인물고에 선조 10년(1557)생이란 잘못된 기록이다. 인조 2년(1624) 진사에 급제하였고, 인조 11년(1633) 증광문과에 갑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재감 직장에 올랐으나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터지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상주지방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집으로 되돌아왔다. 3년 상을 마친 뒤에 병조의 낭관이 되었고, 정언, 헌납, 지평 등 청직을 두루 거친 뒤 어머니의 상을 입고 벼슬길을 떠났다. 효종이 즉위하던 해 (1649)에 다시 지평 벼슬에 올라 김자점의 전형을 논박하고 물러났다. 그뒤 다시 지평, 장령, 집의 등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삼아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부로들이 향병을 불러 일으켜 전지로 나가는데, 그를추대하여 장수를 삼았으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병중의 아버지께서 경계말씀을 하기를 "임금이 난을 당하여 인신이 부급한데 의에 뒤질 수 없느니라"하니 그가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상주땅에 이르렀다.
이때 홀연히 마음이 놀래는지라 군중에 있는 몸으로 사사로이 집으로 돌아 갈 수 없어 다른 장수를 고향으로 보내면서 "더디지 말라" 하였더니 수일에 아버지의 부음이 왔는데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신지 이미 2일이 지났었다. 급히 집으로 돌아가 상을 치르는데 슬퍼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착한 사람이라 하였다. 연하여 집의의 자리에 올랐을때, 곧 사직하며 말하기를 이경여, 홍무적, 심노, 이응시등의 일과 여러 왕손이 어리고 무죄함을 말했다.
이무렵 삼신자가 다음 임금 자리를 서루 다투고 있어서 임금의 뜻을 거슬리게 하고 있으므로 이응시가 옥사로 다스리자고 의논하다가 모두 북쪽으로 귀양가고, 강씨가 사사당하자 여러 왕손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인조가 승하하자 그는 아픈 몸으로 가마에 실려 상경하였고, 다시 지평자리에 올라 상고하여 이르기를 김자점의 전형을 매도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자 수차에 걸쳐 사간 집의에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일찍이 사헌부에 있을 때 어느 사람이 그의 안장을 도둑질해 갔는데 종자가 의심나는 자를 다스리자 하니 그는 웃으면서 "내가 잃은 것은 적고, 저의 악명은 클 것이니 불문에 붙이라" 하였더니, 훔쳐간 그자가 안장을 되돌려 보내 왔었다. 그의 충애감인 함이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