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33년(1538)에 나서 선조 23년(1590)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호원, 호는 각재이며 진주하씨이다.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명종 22년(1567)에 사마시에 급제 하였으며 특별한 천거로 두번이나 참봉의 벼슬을 주었으나 벼슬길을 사양하였다. 수우당 최영경과 동문수학으로 서로가 깊이 사귀어 일생을 학문에 몰두하여 주로 소학을 전념하였다. 그의 문장이 고답적이어서 사우들이 그의 문장을 설중매라 일컬었다. 시문학에 있어서도 역시 소박하고 박진력이 있었다. 진극경이 지은 그의 행장에 이르기를 "남명 조식선생에게 배웠었는데 남명선생께서 그의 재주가 높고, 뜻이 두터운 것을 사랑하여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호원이는 설중한매이다"하셨고, 최영경은 그를 일컬어 "사상백구"라 묘사하였다. 일찍이 벽위에 액자 둘을 걸었었는데 그 하나인데 각각 조열하여 일신의 수식하는 방도를 삼았다.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질하여 어머니를 침실로 찾아 문안드리고 사당에 배알하니 남명선생의 문하에 있는 여러 선비들이 말하기를 "소학에 "계명관즐"(=닭이 울때 세수하고 빗질한다)이란 문귀를 다만 책속에서만 읽고, 보고 하나 그대로 행하는 자는 보지 못했었는데 하각재는 그 일체를 몸소 행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소학이다"하였다. 진주 대각촌에 숨어 살면서도 고상하고 개결하여 시속에 뛰어나서 한점 진세의 기운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