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는 봉산이 있다. 봉황새는 오동에 깃들고, 고결하여 굶주려도 좁쌀을 먹지 않고 죽실을 먹고산다. 그래서 산에는 오동을 심고 강가에는 대나무를 가꾸었다.
봉황새가 사는 곳에는 인재가 나고 후손이 번영한다고 하는 전설적인 믿음과 소망으로 대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것이다. 진양지의 관기총설에는 비봉산을 봉으로 설정하고 대룡, 중룡, 소룡사를 비봉산 둘레에 창건하여 봉황새를 보호하는 형국을 취하였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죽실이 유용한 때가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 지리산 남북의 마을은 그 소용돌이에 곤욕이 큰데다 보리농사마저 흉년이 들어 마을에서는 밥짓는 연기를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산에 올라 칡뿌리를 캐거나 송기를 벗겨 먹는 등 초근목피(草로根木皮)로 연맹했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7·8월경에 산죽이 결실하여 죽실 추수가 수만포대에 이르는 이적이 일어났다. 죽실의 낱알은 보리쌀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 보다는 약간 작았고, 잘 고르면 밥도 지을 수 있지만, 가루로 빻으면 수제비로 끓일 만 했다. 죽을 쑤어도 되었으며 술을 빚어도 되는, 그런 비상 음식물로 죽실이 대용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