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글은 행문 정도였으며, 성품은 약간 괴팍스러워 상소 올리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소장을 올리되 반드시 방백을 통해 올렸는데 작고 큰 일을 가리지 않고 번번이 방백을 찾으니, 방백들도 한결같이 강응룡의 상소문 받기를 꺼렸다. 강응룡은 방백이 자기의 상소문 받기를 꺼리는 기색이 보이면 한 술 더 떠 가마채를 잡아 흔들어 대거나 말고삐를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기가 일쑤였다. 그러면서 "진주 고을 강응룡의 상소문이오! " 하고 외치며 물고늘어지는 바람에 내로라하는 방백일지라도 배겨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하찮은 일에도 소를 써 올리기 때문에 그의 상소문은 번번이 일축되거나 대수롭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한 그의 상소가 제때에 맞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성균관 식객들에게 일대의 이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그때의 성균관 식솔들은 3백 여명 가량으로 대가족이었으며 과거에 오른 유생들이어서 나라에서도 후한 대접을 했는데 그 식탁은 호화로워 쇠고기가 올랐고 침식까지 제공되었다. 여기에 성균관 유생들의 식탁준비를 위한 무리들이 한 몫 보고있었고 이들은 소를 낮은 값으로 사들여 올린 값에 납품하는 등 톡톡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성균관 하인배들이 진주의 소가 헐하다는 소문을 듣고 소를 사러 왔다가 강응룡의 눈에 띄었다. 성균관 유생들의 반찬감으로 진주 소가 죽어나가는 것도 불쾌하거니와 국록으로 그들에게 육식이 제공된다는 것이 못마땅하여 붓을 들었다. "성문대하에 도살이 웬 말이며 유생의 호식은 당치도 않다"며 분개했다.
임금은 이 상소문의 의의가 지당하다고 판단하고 성균관에 금육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성균관 식탁에 올라지던 쇠고기는 사라졌으며 그 뒤부터 성균관에 금육 관습이 생겨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