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았을 때의 일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데, 그것은 동남쪽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았을 때의 일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무덤의 동남쪽에 세우는데, 그것은 동남쪽을 “신령의 길(神道)”로 여겼기 때문이다.
미천면 오방리에 있는 오방재(梧坊齋)의 동쪽에 위치한 이 석비는 조선 태조(太祖) 13년(1416)에 건립된 순흥부사(順興府使) 하윤린(河允潾)의 신도비(神道碑)이다. 하윤린(河允潾)의 자(字)는 소개(所開)이며 본관은 진주(晋州)로서 고려(高麗) 문정공(文貞公) 하시원(河恃源)의 아들로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의 아버지이다. 비문은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지었으며, 비의 형태는 비대(碑臺)는 귀부(龜趺)를 생략한 채 비신의 양쪽에 화강암 받침주를 설치하여 비신을 보호하였다. 이수 역시 약화되어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하윤린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8년(1321)에 출생하여 1330년에 취학하여 곧 향리의 장자(長者)가 되기도 하였다.
1344년에는 식목도감(式目都監), 1356년 문하록사(門下錄事)가 되었고 다시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환난을 당하여 군졸과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비는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의 업적으로 인하여 그의 공적이 더욱 부각된 느낌이 있고 따라서 이후의 신도비는 왕실 주변의 권력층을 중심으로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 관계가 되는 초기양상(初期樣相)을 이 석비가 반영하는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하륜(河崙)으로 인하여 진양부(晋陽府)의 향명(鄕名)이 더욱 알려짐과 동시에 고려 말 조선 초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이미 사회제도가 유교적 분위기로 기울고 있는 자료를 이 신도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