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16년(1561)에 나서 선조 26년(1593) 진주성과 목숨을 같이한 조선조의 무신으로 자는 회원이며 제주양씨로 진주목사로 대사헌이된 송천 양응승의 아들이다. 우계 성혼의 문하에 수학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않았으며 경전에만 전념하면서 천문, 지리와 병학에 뛰어났었다. 특천으로 벼슬은 공조좌랑을 지냈으며 선조 24년(1591) 천상을 보고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임금께 상소하여 그의 대비책까지 건의했으나 사람들로부터 허황된 사람이라고 배척 당했다. 이듬해에 그의 예언대로 과연 임진왜란은 터지고 말았다. 그는 김천일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빛나는 공을 세웠고 진주성이 떨어질 무렵 창의사 김천일이 그를 불러 "그대는 물재주에 뛰어났으니 살아남아 뒷 일을 도모하라"하였으나 그는 대답하기를 "구차하게 살기위해 군영의 상하와 성을 배신하리오"하고 김천일을 뒤따라 남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뒷날 나라에서 좌승지를 추증하고 진주 창렬사에 모셨으며 시호는 충민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