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1년(1469)에 나서 중종 7년(1512)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운정, 호는 신당이며 해주정씨 현감 정철견의 아들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성종 17년(1486) 진사에 급제하였고, 성종 23년(1492)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고, 정자 지평 정언을 거쳐 연산군 10년(1504) 교리로 있을 때 갑자사화에 걸려 영덕으로 귀양갔었다. 중종이 반정을 하자 다시 교리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병을 얻어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뒤에 청송부사가 되었다. 번암 채제공이 지은 묘갈에서 이르기를 "그는 일찍이 안상도를 저술하여 성현의 치심, 격언, 대대, 배상, 장경으로 근본삼고 조장으로 경계를 삼아 좌구사 우구사는 단서에 씀과 태욕의 경계등을 취했다. 퇴계 이황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정선생의 학문과 조예의 정함을 여기에서 가히 알 수 있다"하였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노론 읽기를 기뻐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나로 하여금 이적에게 논어를 가르치게 했더라도 역시 능히 그 대의를 알았을 것이다"하였다. 연산군 때 교리로서 정사를 의논하다가 영덕으로 곤장 맞고 유배되었더니, 중종께서 반정하자 다시 교리로써 부르니 병을 빙자하고 시골로 돌아갔다. 이때 영의정 성희안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붕은 순정한 선비이오니 성조에서 어진 사람을 쓰기가 급하온데 오래 시골에 두는 것이 마땅치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긴들에게 밭가는 늙은이와 동해서 낚시하는 늙은이를 천거해 말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하며 교지를 내려 부르기를 심히 간곡히 하니 그는 하는 수 없이 부임했다. 일찍이 그중에 들어가서 홍경주를 보고 그는 마음속으로 놀랬고, 그의 박상의 조심이 있을 것을 알고 드디어 술병을 핑계삼아 외직을 구하여 총송부사가 떠났다. 영의정 성희안이 글을 보내 잣과 꿀을 구해 보내라 하니 그는 회답하기를 "잣은 높은 산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속에 있으니 태수가 무슨 재주로 얻는단 말이오"하고 거절하였다. 연산군 때 사람에게 말하기를 "꿈에 문묘의 신위를 중의 집으로 옮겨갔으니 이 무슨 조짐인가" 하더니 뒤에 성균관이 연산군의 놀이 장소로 변하고 문묘의 위패들은 산속의 일개 암자로 옮겨졌다. 이 무렵 강혼 심순문이 사인이 되었는데 모두 만나보는 기생이 있거늘 그가 타일러 멀리하게 하고 이르기를 "뒷날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강혼은 경계를 하였으나 심순문은 듣지 않더니 얼마 안가서 두 기생이 궁중으로 뽑혀들어가 임금의 총애를 받게되자 심순문은 죄없이 죽음을 당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퇴번하여 집에 돌아오니 집사람이 밥상을 내왔다. 그가 묻기를 "쌀밥이 어디서 났느냐" 하였다. 분이 옆에 있다가 "종아이가 아침에 류자광 판서댁 갔더니 류판서가 말하기를 정붕이 고집이 너무 세어 나를 한번도 찾아보지 않는구나 하며 쌀 두 말을 보내왔습니다"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 일은 내가 미리 그대에게 이르지 않은 과실이었다" 하고 들었던 숟가락을 다시 놓고 상을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뒷날 류자광에게 몰려 귀양길을 떠나는데 류자광이 독약을 싸서 주며 작별 인사로 "그대의 이번 길은 마침내 헤어나지 못할 것이로다"하며 은근히 자살을 종용했다. 그는 태연히 그 독약을 받아 간수하였다가 귀양에서 풀려나 류자광이 죄를 입었을 때 그 약을 류자광에게 되돌려 주었다. 퇴계 이황이 말하기를 "한 고을에 착한 것은 전에는 야은 길재와 같은 풍절이 있었고, 뒷날에는 신당 정붕의 도의가 있었도다" 하였다. 그가 세상을 뜨자 충재 권발이 한원에 있다가 특서 하기를 "정봉이 청송부사가 되었을 때 기도가 웅위하고 명예를 구하지 않았고 벼슬을 즐겨하지 않았으니 이 세상이 가히 더불어 유위하지 못할 것을 알았도다. 외직을 구하더니 끝내 여기에서 죽고 마는 구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