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8년(1446)에 나서 연산군 10년(1504)에 세상을 떠나신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이신, 호는 겸부이며 진주정씨 대제학 정척의 아들이다.
성종 5년(147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 지평을 거쳐 성종 12년(1481) 경기도 경차관을 지내고 이듬해에 부응교가 되었다. 성종 17년(1486) 시강관으로 있을 때 대마도 선위사가 되어 다녀왔고, 이듬해 해주목사를 지낸 뒤 성종 24년(1493) 좌부승지로 있을 때 해주목사 때의 아전들의 부정이 탄로되어 파면되었다.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승지 직제학을 지냈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성종 25년(1494) 성종께서 승하하자 3년간의 수묘관을 맡았었다. 다시 행호군이 되었으나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 그 사건에 말려들어 그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매달았다. 중종 1년(1506) 중종의 반정이 성공되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향인 진주에 정문을 세웠다. 시호는 충절이다. 그는 본시 천성이 강직하고 청백하며 모든 행함이 세속사람과 달랐고, 동함과 율함이 법으로써 행하였다. 대가 비뚤어진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밝혀서 바로잡고, 의리에 당하는 바에는 분발하여 기탄함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는 반면, 또한 이로인해 화를 입은 것이다.
일찍이 성종께서 신임하였으므로 아는 바를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하여 되지 않음이 없었으니 위로부터 성학의 심술 은미한 것과 국가의 치란, 흥망에 대한 이유며 군자와 소인의 진퇴 소장하는 기회와 사습을 밝히고 인심을 맑게하는 것과 기강을 진작시켜 풍속을 두터이 하고 이적을 상대함과 방위를 엄하게 하고 군졸을 훈련시키고 기계를 정비하는 모든 하여야 할 것들을 모두 진술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격동하는 것으로 하니 말씀의 뜻이 너무도 간절함으로 임금께서 마음을 기울여 착실히 들었으며, 일찍이 눈으로 암시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진실로 나의 더함이 있는 벗이로다"하고 이에 하교하기를 "경은 전조에서 다른 곳에 전직하지 말라"하여 부수찬으로 부터 직제학에 이르기까지 10여년을 다른 벼슬에 옮기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에 내원에 들어가서 임금앞에 엎드렸는데 임금께서 그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그대가 있지 않으면 어찌 지극한 의논을 얻어 들으리"하였다. 그때 마침 국화꽃이 만발하고 달빛이 심히 밝았다. 술을 내리시고 밤이 깊어져 퇴궐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큰 잔을 들어 가득히 부어주므로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 임금께서 입었던 윗옷을 벗어 덮어주며 환관에게 명하여 옆에서 지키라 하였다.
새벽녘에 닭이 우니 임금께서 "어느 때에 술이 깼으며 지금도 내원이 있는가"하고 물으니 환관이 "조금전에 일어나 덮었던 어이를 받들고 오랫동안 감격하여 울다가 사배를 드리고 옥당으로 나갔습니다"하니 날이 밝을 즈음에 명령하여 그 어의를 본댁으로 보내 주었다. 그가 일찍이 일본으로 사신갈 때 왜인이 보내는 선물이 종전의 예가 수천금에 달하였는데 그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목에 매림사가 있었는데 너무나 깨끗하여 일행들이 잠깐 쉬었다 가자하니 그가 이르기를 "나의 몸이 어찌 좋은 곳 구경하는데 있겠는가"하였고, 병을 청탁하고 있었는데 해질무렵에 일본사자가 와서 문병하고 약을 가지고 왔는데 외면으로는 작은 약이었으나 그 약의 무게가 들기 어려웠다. 이것은 황금을 환약모양으로 만들어서 속이고 받기를 원함으로 그는 팔짱을 끼고 타이르기를 "비록 약이라도 밤이 깊어가는데 알지 못하는 것을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읍을 하니 사자가 돌아가 버렸다.
그가 대마도주의 집을 찾아 우리 국왕의 명을 받으라 하니 도주가 문밖에 나와 명을 받기를 꺼리므로 그는 도주의 문밖에서 호상에 걸터앉아 통역에서 명령하여 명을 받기를 독촉하여 의례와 같이 절차를 마친 뒤에 연회를 베풀고 도주가 사신에게 드리는 폐백 올린것이 불과 그림 부채와 패도와 후추 약간과 향나무 몇쪽에 불과했다. 일행이 받은 선물들은 한데 묶어 두었다가 떠날무렵 뱃머리를 돌릴즈음 왜인에게 그 물건을 주어 도주에게 되돌려 보냈더니 그 뒤에 도주가 사람을 우리나라로 보내와서 그 물건들을 나누어 주기를 청함으로 임금께서 그 청하는 대로 따르라 하니 그가 아뢰기를 "신이 왜국에 있을 때는 받지않고, 돌아와서 받으면 앞과 뒤의 마음이 다르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니 임금께서 억지로 하지 못했다. 또한 왜국에서 떠나올 때 칼 한자루와 벼루 한점을 주면서 말하기를 "칼은 몸을 보호하는 물건이요, 벼루는 선비의 문방구이니 청렴과 결백에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하며 받기를 간청하였다. 그의 기색을 살피니 받지 않았다가는 무슨 변이 있을 것 같아 부득이 받아 두었다가 뱃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너희들의 노고는 가히 이 물건을 팔아서 나누어 가질만하다" 하니 뱃사람들이 칼을 받아 돌아갔고, 벼루는 하인배의 가질것이 못된다 하고 바닷속에 던지고 돌아왔다. 성종께서 승하하시매 그는 3년의 복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군사부일체의 의리를 다했다.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음란하고 포악함이 날로 심하여지니 그는 과감하게 간하고 괴롭도록 투쟁하였다. 또한 권력을 좋아하는 무리들의 모함을 받아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한지 10년,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났던 갑자사화 때 평소 연산군의 미움을 샀기에 연산군이 이르기를 "군주를 위하여 3년의 복을 입는것은 평민집에서 행하는 속된 것이다"하고 죄수로 얽어 화를 입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을 여막에서 시묘하여 거상을 슬프게 하여 몸이 수척해졌다. 그러나 자기가 스스로 전을 드릴 음식을 만들어 조석으로 예를 극진히 다하고 비록 급한 공무라도 삭망에는 묘소에 가서 부모의 옆에 있는 것 같은 성의를 다하여 뒷날 효자로서 정려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