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13년(1672)에 났으나 세상뜨신 해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조의 무신으로 자는 성뢰이며 청주한씨로 조은 한몽상의 증손이다. 숙종 21년(1695)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바다 저 쪽의 적이 심양과 요동 사이를 출몰하여 약탈이 심하였고, 이어서 역시 우리나라의 변경을 노략질 하여왔다. 조정에서 근심하였으나 따로이 무반에서 제일가는 인물을 뽑으려 하는데 그가 여기에 뽑혔다.
이에 대전에서 임금께 사은하고 스스로 청하여 은자를 얻어 뜻밖의 일에 대비하고, 명령을 받들어 밤낮으로 달려 몰래 적의 소굴에 숨어들어 여러가지로 기계를 꾸며 적정을 탐지하고 다시 북경에 들어가 적의 상황을 중국조정에 알리려 하였으나 이때 중국의 세종이 상림원에 나가 있었는데, 예부에서 길이 멀다하여 곧 임금께 알리려고 하지 않으므로 장차 오래 머물고 있다가는 명을 받든자가 내 나라를 벗어나서 시일을 허비하면 임금에게 걱정을 끼칠까 염려되어 이때 갖고간 은자를 예부에 뇌물로 써서 빨리 알리게 하고 일을 성공시켜 돌아오니 이에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제주목사에 승차시켰다. 이해에 큰 흉년이 들어 제주도 전체의 백성들이 장차 모두 굶주리게 되었다. 그가 극력으로 양곡을 조달하여 관수를 내고 제반 관용의 물건을 풀어 수만섬의 곡식을 구하여 집집마다 나누어 주니 모두가 근심을 놓았다. 또한 병이 들어 인명이 많이 죽어가므로 서울에 사람을 보내 약을 구하고 약방문을 내어 치료시켜 구호하니 섬사람들이 감지덕지해서 3면에 송덕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임금께서 그 수고로운 정사를 가상히 여겨 하유하여 그 아름다움을 포상하고 벼슬을 높여 통어사가 되었고, 부총관을 지내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안성에서 적을 크게 쳐부수었고, 영조 8년(1732)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잇따라 경상우도,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