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나서 조선 성종 6년(1475)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문신이며, 과학자로서 자는 명지, 호는 정암 혹은 창재라 했으며, 진주정씨 정설의 아들이다. 태종 8년(1408)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다시 태종 14년(1414)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 감찰 등을 지냈다. 예조정랑 때는 검상을 겸직하기도 했으며, 전농지 소윤을 거쳐 지승문원사를 역임했다.
세종 26년(1444)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공조, 호조, 예조의 참의를 두루 거쳤고, 경창부윤으로 있을 때인 세종 31년(1449)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양계지도를 그려 받았고, 단종 2년(1454) 판한성부사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이 해에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자 지충추원사가 되었다. 세조 9년(1463)에 양성지와 더불어 동국지도를 그려 바쳤으며, 부직을 지냈다. 그는 또한 해서, 전서에 뛰어나 많은 옥쇄와 관인의 글자를 썼으며, 또 전고에도 조예가 깊어 많은 의제를 지었다.
시호는 공대이며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근엄하여 모든 행하는 일이 정민 하였고, 문장 다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관리로서 청렴하고 성의로 다했으며, 예학에 조예가 깊어 무릇 조정의제의 조목에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그가 바로 잡았다. 성종 초에 5예의 동국여지도를 수정하는데 참여하였다. 국상 때에 쓰이는 임금의 관나무를 시기에 따라 마련하되 그는 미리 이를 제조하여 해마다 옷칠을 하고 청음으로 장생전을 세웠고, 나라안에서 넓이 황장목을 구하여 관을 만드는 감독을 직접하여 국장에 유감없게 하였다.
세종 31년(1449) 성절사를 떠나 보낼 때 그때 마침 가달족이 중국의 소도를 쳐들어와 요동길이 막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고 있었다. 그는 씩씩한 태도로 난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떠나는 날 임금께서 특별히 세자를 보내 전송토록 하고 그를 위로하였다. 길을 떠난 뒤에 들으니 명나라 왕은 북쪽으로 피난가고 수도는 적에게 포위 당하였으며, 민중들이 들떠있다 하였으나 그는 빨리 달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명나라 수도에 도달하니 새 임금이 자리에 올라 있었다. 아침 조례를 할 때 북을 향하여 피난길에 있는 전 왕에게 성절하례를 의례에 따라 행하니 보는 사람들이 평하여 말하기를 예를 존중하는 사람이라 하였다. 조정에서 60여년을 벼슬하다가 여섯 임금을 섬겼다.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부왕께서 "청직" 두 글자를 그대에게 허락하였음이 지금도 내 귓전에 남아있다."하며 그에게 의복과 말을 하사하였다. 그는 문장을 지을 때 음하고 화려함을 택하지 않고, 오직 팽팽하고 온화하며 혼후하니 일세의 소중한바 되었다.
세종 때 대제학으로 시험관이 되었으며, 분장 재덕이 선비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또한 글씨를 잘 써서 예서와 전서에 뛰어났고, 여러가지의 전각과 편액과 종에 새긴 것이며, 여러 공경들의 묘비에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초 때 서책을 반포할 때 그 예가 내사 두 글자로 표제를 하였는데 그의 건의에 따라 내사 두 자를 고쳐서 그 보장에 "선사지기"라 새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글씨 또한 그의 글씨로 이루어졌다. 그는 춘정 변계량의 문하에서 배웠고, 벼슬이 수문관대제학에 올랐고, 효성이 지극해서 삭망 때 마다 가묘에 색다른 음식을 차려 정성껏 제사했다. 조정에서도 모든 범절이 예에 어긋나지 않았다. 육조에 두루 벼슬하여 나이 86세에 "기로사에 들어가 청백리로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