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6년(1593)에 나서 현종 7년(1666)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중원, 호는 겸재이며 진주하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남달랐는데 병란의 세상을 당하여 어버이가 어린 애를 데리고 거리를 방황할 때 전라도를 떠돌아 다녔다. 열살 때 비로소 소학을 읽는데 능히 힘써 행함을 알았고, 12세에 이미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벼슬길을 단념하고 경사의 연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6세 때 아버지의 상을 입어 밤낮으로 호곡하여 거의 멸성 할 뻔 하였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이미 몸이 쇠약한지라 3년의 상을 치르고서, 병이 깊어 다시 인사로서 예를 다하지 못하고 오직 생도들을 응접하여 강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뒤에 벼슬길에 추천되었으나 사퇴하고 암천의 산재에 머물며 정자를 지어 영귀당이라 현편을 걸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겸약함을 좋아해서 스스로의 호를 겸재라 했으며, 사람들에게 돈독하고 두텁게 예로 사귀었고, 또한 효제함을 높이 받들었으므로 고을 선비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효종임금께서 승하하자 그는 기내에 살고 있었으므로 제쇠 석달을 입은 뒤에 국제에 따라 사사언과 같이 복을 입었다. 효종 3년(1652)어사 남구만이 진주에 와서 안계에 살고 있던 그를 찾았는데 이 무렵 조정에서는 예법을 가지고 싸우고 있었는데 말하는 사람은 모두 배척하고 쫓겨나므로 그 정당한 의견을 물으니 그는 말하기를 "차장이 된지 3년이라는 것은 경전에 명시되어 있고, 더욱이 효종이 이미 군림하였으니 장소적서를 의논할게 무어 있으리까" 하였다.
남구만이 이런일을 임금께 복명할때 그의 말을 사실대로 아뢰니 그 때 그의 나이 이미 70인지라 임금이 조를 내리시고 또한 존사의 하지가 있어서 심히 후하게 하니 그가 고하여 은혜를 사례하고 그로 인하여 군도구사를 지어올렸다. 그의 학문은 사람으로써 떳떳이 지켜야 할 도리를 근본으로 하여 매양 예로써 사람을 권하고 학업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선행을 한 뒤에 말하더니 세상이 어지러움을 보고는 결신독행해서 50년 동안을 의가 아니면 한개도 사람에게 주지않고 한개도 사람으로부터 취하지 않았다.
예속에 돈독했었고, 관혼 상제를 중히여겨 여자의 잠을 국속에는 써놓은 것이 없었으나 유독 그의 집안에는 이 예가 있었다. 일찍이 일월성신의 도를 추점하여 현망, 회삭, 월윤의 그림을 그려놓고 이르기를 "지금의 역법이 어지러워 졌으니 이것으로써 미루어 하면, 거의 실수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