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2년(1589)에 나서 현종 3년(1662)에 세상을 뜨신 조선조의 학자로 초명은 몽인, 자는 자변, 호는 조은이며 청주 한씨로 좌찬성 한계희의 5대손이다. 박제인, 정구, 장현광에게 사사했으며, 광해군 5년(1613)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인조 때 특천되어 대군사부를 지내고 동몽교관을 역임했다.
그는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6년간의 예법대로 수상하였고, 복을 벗은 뒤에도 몸이 상해서 학업이 진취하지 못했었다. 비로소 박제인의 문하에서 집질해서 먼저 300편의 의의를 물으니 선생이 칭찬함을 마지않았다. 정구도 또한 그 기량됨을 중히 여겨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늦게는 또 장현광에게 나아가 학업을 닦으니 동문들이 모두 떠 받들었다. 정인홍이 용사할 때 같은 고을의 성호정이 그에게 가보라하니 그가 정색하며 거절하기를 "그 사람이 학술로 퇴계를 헐뜯고, 폐론 할 것을 주장했으니 실상 사문의 난적이요, 나라의 흉적인지라. 내가 일찍기 가야산의 절승을 보고싶어도 그 사람의 집 근처인 까닭에 그 땅을 밝기가 싫어서 가지 않았거늘 하물며 그 사람을 찾는단 말인가"하였다. 광해군의 혼정을 당해서 과거 볼 것을 단념하고, 산골에서 뜻을 지키고 살았다.
병자호란이 터지자 의병을 불러 일으켜 의병대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1월에 이미 화의기 성립 되었으므로 스스로 의병군을 해산시켰고, 당세에 뜻을 두지않고, 시골에 숨어 정자를 짓고 바위에 석정이라 새겼다. 미수 허목이 한번 만나보고는 서로 지기가 상합하여 글을 보내어 "만년에 와서 청복이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건섬케 하도다"하였다. 진주성안에 있는 김시민목사 전성각적비의 글씨와 의암의 남쪽면의 두 글자를 적은 각명은 모두 그의 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