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백은 국화를 사랑함이 유달라 그의 아호도 국담(菊潭)이라 하였다.
그는 국화를 연못가에 심어두고 그 꽃이 만개할 때면 으레 벗을 불러 시회를 열고 국화술을 빚어 벗과 두 아우와 더불어 즐겼다.
일찍이 나이 세 살에 글을 알고 여섯 살 때는 능히 시를 지은 문장가였다.
1790년 진사시에 나아가 등과하고 다섯 차례에 걸쳐 임금에게 입시 하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고, 정조 또한 눈여겨본 인재였다.
그러나 끝내 출사가 좌절되어 큰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국화사랑은 이래서였을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국화사랑은 도연명이라고 하나 형제와 더불어 즐긴 아취는 도연명도 갖추지 못한 바라고 일컬었다.
웬일일까, 선학처럼 살다가 종명하니 구망일이면 망울을 터뜨리던 국화가 시들어 죽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국화도 공을 따라 순절한 것이라고들 말했다. 아우 진중의 슬픔은 더욱 사무쳤다.
"국화여 오늘 너 죽음은 주인이 가니 너도 간단 말인가 형 그리는 아우 마음 헤아려 다시 피어날 줄 믿노라." 다음 해 가을 국화는 다시 피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