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매일신보 1919년 3월 25일자 기사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에 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해 3월 17일, 진주 도심거리에는 시민과 학생, 독립유공자 유족 등이 참여하는 대규모 3·1절 독립만세 재현행사가 펼쳐졌는데, 이날 행사에는 기생과 걸인 중심의 3·1운동을 전개한 진주지역 독립 만세운동의 특색이 반영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3·1운동사에 천민으로 불리던 기생과 걸인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외쳤던 역사적인 고장이 진주이며,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42일 동안 전국 100곳에서 열리는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봉송행사에 경남에서 유일하게 진주시가 선정 된 이유이기도 하다.
1919년 일제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맞서 만세운동을 벌인 이들은 전국의 지식인과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상인만은 아니었다. 전국의 기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운동의 대열에 나섰는데, 독립만세 함성이 전국을 휩쓸었던 1919년 진주에서도 한금화를 비롯한 진주권번(기생조합) 소속 기생 30~50여 명이 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우리나라 3.1독립운동 최초의 진주 기생독립단이었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변을 돌며 촉석루를 향해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계속했다. 진주성 남쪽 벼랑 위에 세워진 촉석루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자축연을 벌였던 곳으로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국했던 의암(義巖)은 촉석루 바로 아래에 있다. 기생독립단이 촉석루와 의암을 목적지로 정한 것은 의기(義妓) 논개의 기백을 이어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이들의 독립운동은 의기 논개의 나라사랑 정신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경상남도 각 시군의 3·1독립운동’ 등에 따르면 일제 경찰 수십 명이 나타나 긴 칼을 뽑아들고 위협을 가했지만 “우리가 이 자리에서 그 칼에 맞아 죽어도 우리나라가 독립되면 여한이 없겠다”고 소리치며 이들은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기생 6명이 체포되었으며, 체포된 한 기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썼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진주 기생의 정신과 행동은 경기도 수원, 황해도 해주, 인근 통영 등 전국에서 잇따른 기생들의 만세 시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생들은 비록 천한 신분을 면하지 못하고 힘든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대한독립만세운동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위해 앞장서 만세운동을 펼친 것은 일찍이 세계 역사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로 진주 정신이 오롯이 반영된 진주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