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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리

화동(花洞)

화봉산은 지리산의 주령으로 정촌면의 주된 산이다. 예로부터 "당개"라 불렀다고 하는 이 산은 자생하고 있는 진달래, 연지, 들란초, 복숭아꽃, 살구꽃, 백일홍 등 이 만발하였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꽃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화동은 이에 연유하여 부르는 말이다.

화원(花院)

1996.04.01 화동마을에서 분리된 마을이며 1980년도와 1992년도에 취락구조로 형성된 마을이다.

매동(梅洞)

자연마을로 매동(불매골)과 내동(안골)이 있다. 서재골은 마을 오른쪽에 옛날 공부를 하던 서당이 있었다 하여 일컫는 말이다. 일제 강점때에는 마을 옆에 정촌초등학교가 있었는데 18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개양으로 이전하였는바 지금 정촌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예의바르고 향학열이 높아 칭찬을 받고 있는 것도 일찍이 서당이나 학교가 있어 문명을 빨리 받은 까닭이다. 불매골은 마을 앞산 아래 불매터에 옹기굴이 있어 불매터 앞들이라는 데서 유래했고 안골은 위치상 안쪽에 있다는 뜻이다.

이동(梨洞)

북쪽 물부려재 중봉의 돌배골에 지금까지 배나무가 있어 배골이라 하였다. 행정상 마을 명칭은 이(梨)자를 따서 이동이라 부른다.

모심(慕心)

원래 진양강씨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웃어른을 섬기는 것을 제일로 여겨 심성을 좋게 기른다는 목적에서 사모할모(慕), 마음심(心)자를 따서 모심이라 하였다.

죽봉(竹鳳)

시초에는 죽방(竹坊)이라고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대밭에 봉이 왔다 하여 마을 이름을 죽봉이라 하였다 한다. 진삼선 철도가 마을 중심을 통과하고 북쪽에 죽봉터널이 있으며 아래쪽에는 죽봉저수지가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는 500년 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관봉리

고미(古美)

옛 이름은 산 꼬리가 아홉등으로 이루어져 구미골(九美谷)이라 부르다가 정자나무가 여러 나무 있어서 길손들의 휴식처로 더없는 곳이기에 계미골이라고 고쳐서 부르다가 그 뒤 아름다운 골이라 하여 고미(古美)라고 부르고 있다.

봉동(鳳洞)

앞산이 봉(鳳)새를 닮았다 하여 새밭골이란 안동네와 앞산너머 봉새가 지나왔다 하여 묵은 새밭골이 있다. 새밭골에는 봉새를 닮은 암 수의 형상석이 있고 숫봉새는 암봉새를 따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경운기 길이 뚫린 후에 숫봉새와 암봉새의 머리가 없어져 버렸다.

봉전(鳳田)

무선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뒷산은 학이 밭에 내려앉는 형태이기 때문에 봉전이라 부른다. 우백호 등은 학등이고 좌청룡은 무선산이다. 우백호 등밑에 용청사(龍淸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고 없어졌다. 좌청룡인 무선산 중턱은 진(陳)터라고 전해왔는데,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다. 무선산 밑 중턱에 용바위가 있는데 용이 등천했다고 하는 굴이 있다.

소곡리

소곡(所谷)

1930년경에는 180여 호가 거주하였으나 진주시와 사천시의 경계인 두량저수지가 축조됨으로써 생활터전인 농토를 잃고 진주, 부산 등지로 일부 농가가 이주하였다. 남은 농가는 경지면적이 작아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생활을 하는 마을이었으나 70년대 이후 과수원을 개간하여 단감의 주산지로 변모한 개척정신이 강한 농촌으로 탈바꿈하였다.

삼웅(三雄)

예로부터 소곡리 섭동으로 이어 내려왔으나 1979년도에 독립하여 마을 이름을 삼웅이라 부르게 되었다.

예상리

대초(大草)

소가 풀을 먹는 격이라 하여 대초(大草)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구산(龜山)

산이 거북과 같은 형태로 생겼다고 하여 거북구(龜)자를 따서 구산(龜山)이라고 한다.

예하리

강주(康州)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기원전 2천 년경 이전인 상고시대부터 서부경남의 중심지로서 문화의 터전임을 짐작하게 된다.

  • 첫째로 지금도 인근의 밭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발견되고
  • 둘째로 강주는 옛날부터 영터(營基)라고 부르고 있는데, 강주라는 명칭은 신라 경덕왕16년(757년) 이래로 124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지명이다.
  • 셋째로 고려말 왜구의 침범이 있었을 때에 배극렴이 강주진장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곳에 강주진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금산(錦山)

금산이란 이름은 강주를 둘러싼 지형으로 영터를 보호한다는 뜻에서 금산이라 부른다.

큰 마을(大村)

현재 밭으로 되어 있는 통배이라 불리는 곳이 옛날에는 큰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마을 이름을 딴것으로 생각된다. 조선말기와 일제 초기에는 가차례면에 속했는데 옛 면사무소 건물과 사택이 있었으나 몇 년 전 개인주택의 신축으로 없어졌다.

강주연못

강주연못은 본시 강주의 영터라고 전하며 고려말 우왕 5년(1379년)에 배극렴이 진을 치고 있던 영터였다는 것이 하륜(1347∼1416)의 촉석성 성문기편에 기록되어 있다. 강주못은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못 뚝에는 수령 5∼6백 년 정도의 고목이 우거져 있고 또 그곳에 있는 이팝나무는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말이 전하는 것 등으로 보아 이 강주 못 일대는 진주·진양의 역사상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조 말엽 남호 강영지 선생이 마을 입구 도저봉(산) 밑에 일호정(一湖亭)을 건축하여 영남 석학들이 매년 음 3월 13일에 학문연구와 회의장소로 사용하였고 남호선생의 아들 강현수는 일제치하 때 주위 사람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못뚝에는 오래된 고목이 무성하여 경치가 좋아 봄·여름·가을 할 것 없이 연중 유람객이 많고 진주시내 학생들의 소풍놀이 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강남(康南)

1993.01.08 강주에서 분리된 마을이며 사천비행장 확장으로 인한 이주민의 정착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강서(康西)

1982년 강주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옛날에는 강주등이라고 불렀는데, 강주 영터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 마을 샘터에서 물로 배를 채우며 땀을 닦고 편안하게 쉬었다가 가는 곳이기도 했다.

목과(木果)

옛날 큰 모과나무가 있었고 과일나무도 많다하여 지은 이름이라 한다. 공공건물은 예하초등학교가 있고 남부농협 예하지소가 있다.

대축리

대방(大芳)

유래는 골짜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옛날에는 축동면 중사동으로 되어 있었으나 일제 때 대축리 대방으로 변경되었다. 오룡골은 옛날에 용이 5마리가 있었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함촌(咸村)

전설에 의하면 함안고을 원이 살았다 하여 함안촌이라 하였는데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진양지에 의하면 옛 지명에 함안촌이 있었다. 약 400여 년 전 의령군 가례면 부근에서 밀양박씨가 피난을 와 정착하면서 신안주씨와 의형제를 맺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과 서씨, 황씨 등이 살고 있다.

향교

생긴 마을 혹은 향기마을이라 불렀다. 옛날 향교가 있었다는 증거로는 박씨 묘소의 비문에 향교안산에 위치한다고 새겨져 있고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30여 년 전 집을 건축하기 위해 터를 고르다가 향로항아리, 기와, 도자기 등이 발견되었고 70년대 말 새마을 사업 때에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한다. 옛 향교터에는 일제 말기까지 서당이 있었고 이 고장 청년들이 음력 보름(8. 15)밤에 자발적으로 모여 민속씨름대회도 치렀으나 지금은 밭으로 개간되었다.

심대(深大)

유래는 옛날 심판사 세력하에 있다가 서울로 떠난 후 구암 이정선생의 입산을 계기로하여 포구정이라 칭하였다 한다. 구암선생의 묘소는 대축리 한골이라 하였는데 왜정 말기에 심대라 개칭하였다. 마을에 있는 실봉산은 전설에 의하면 천지가 개벽할 때 산봉우리가 떡시루 정도 남고 물에 잠겼다 하여 실이바위, 집화바위, 할머니바위, 미륵바위 등의 이름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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