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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우리 조상들이 지은 지명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지혜(智慧)가 서려있다. 해마다 천우로 물난리를 겪는 피해도 있지만, 수곡(무실)이라는 이름은 물이 많은 곳을 뜻하여 산꼭대기에 우물을 파도 물이 철철 흘러내린다고 하는 전설이 전하는 바, 본면의 중심지에는 대천이라는 한샘이가 있다.

"한"의 뜻은 큰(大) 또는 으뜸(元)을 나타낸 것으로 "샘"은 「옳은 마음」으로 해석된다. 한샘에서 나온 물이 수곡 하부를 적시고 그 수계(水界)가 수곡면 일대의 원천(源泉)이 되었다하여 무실(수곡)이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정한 지명에서도 조상들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다.

본면의 연혁을 거슬러 올라가서 보면 선사시대에 수곡면 내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됐고 인근 각처에서 주거유적지, 지석묘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 고장은 기원전 2000년경 이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조 전기 진주목 방리(坊里)가 4면 111리로 되었을 때 본면은 서면(西面)의 원당리(元堂里), 수곡리(水谷里), 이하리( 下里), 자매곡리(自梅谷里) 등 4개리로 편성되었다가, 인조 10년(1632)에 종래의 4면 111리를 4면 62리로 통폐합했을 당시 서면 원당리(元堂里), 수곡리(水谷里), 이하리( 下里) 등 3개리로 개편, 고종 1년(1864)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의하면 리를 면으로 하여 원당면(元堂面), 이하면( 下面), 수곡면(水谷面)으로 개편, 광무 10년(1906) 9월 24일에는 칙령 제49호에 의거 진주군이 50면 298리를 소관했을 때 원당면, 수곡면, 대각면으로 개편하여 원당면은 내동(內洞), 외동(外洞), 수곡면은 중전동(中田洞), 요산촌(樂山村), 하촌(下村), 효자동(孝子洞), 점촌(店村), 사방촌(士芳村), 구태촌(九台村), 조계촌(潮溪村), 창촌(昌村), 대각면(大覺面)은 자매곡(紫梅谷), 불모동(佛毛洞), 사곡(士谷), 상대우(上大牛)를 소관하였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거 진주군을 19면 148리로 개편 당시 수곡면은 효자리(孝子里), 대천리(大泉里), 창촌리(昌村里), 원내리(元內里), 원외리(元外里), 사곡리(士谷里), 자매리(紫梅里) 등 7개리를 소관하였다. 동년 일본 헌병이 명석면(鳴石面)에 주재하면서 본면 행정 및 치안을 담당하였다 한다.

1917년 3월 15일 본면 효자리 요산동(孝子里 樂山洞)의 가(假)면청사에서 초대 심호섭(深護燮)면장과 많은 면민들이 모여 개청식을 거행하고 사무를 개시하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운동을 심호섭 면장이 주동하여 많은 면민들과 더불어 창촌시장에 나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1920년 수곡면사무소는 면 중심지로 이전되어야 한다는 면민들의 건의에 따라 본면 대천리 금동(琴洞) 가(假)청사로 이전했다.

1932년 면민들의 건의에 따라 군 재정으로 면 청사를 대천리 122-2번지에 건립 이전했다.

교육시설로는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대각서원이 철폐된 후 일본의 신학문 배척과 항일정신이 강했기 때문으로 뒤늦게 1932년 수곡 공립보통학교 4년제 인가 개교, 1940년 수곡 공립심상소학교 6년제 연장, 1945년 수곡국민학교 개칭, 1939년 사곡간이학교 인가 개교, 1948년 사곡국민학교 승격인가, 1946년 수곡국민학교 원당분교 설치, 1955년 원당국민학교 승격인가, 1965년 원당국민학교 광명분교가 인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면민들은 도탄(塗炭)에 빠지고 온갖 수모(受侮)를 겪으면서 억울함과 굶주림을 슬기롭게 견디어 드디어는 36년간의 일제치하를 벗어나 1945년 광복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굶주림을 탈피(脫皮)하기 위하여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와중에 산림(山林)을 훼손(毁損)하여 산천은 황폐계류(荒廢溪流)되고 민심은 걷잡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1949년 8월 지방자치제도의 시행에 따라 경제생활에 보탬이 되었기에 그 활력소가 기본생활의 원천이 되어 점차 발전 일로(一路)에 있었다.
38선이 가로막히자 사상적이고 자유행동 무분별 자들이 이 세상을 혼란(混亂)케하는 좌익분자들의 소행으로 1949년 11월에 공비의 방화로 면청사가 전소(全燒)되고 면 행정은 다시 효자리(孝子里) 요산동(樂山洞) 민가로 옮겨졌다.

얼마후 설상가상격으로 1950년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약 3년간 난중(亂中) 민심이 사납게 되고 경제적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되었다.

1952년 군 재정으로 본면 대천리 122-2번지에 가 청사를 건립하여 다시 이전했다. 주민들의 자녀 교육열 향상으로 본면 중·고등학교 유치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상부에 건의한 결과, 일차적으로 1953년 진서(晉西)중학교를 유치, 개교하게 되고 1982년 진서(晉西)고등학교를 유치, 개교되어 도시 못지않는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학생수가 감소되고 있다.

1955년 7월 1일 법률 360호에 의하여 하동군 옥종면 원계리가 본면에 편입되었으며 동년 9월 23일 사곡(士谷)국민학교 원계(元溪) 분교실 설치, 1957년 원계분교장 설치 개교, 1961년 원계국민학교 승격인가, 개교하였다.

1966년 9월에 신축 면 청사가 준공되었다.

1967년부터 시작된 인초와 1970년부터 조성된 사과가 본면 특산물인데 인초재배 당초는 미작(米作)보다 2∼3배 높았으나 현금에 와서는 국제 가격하락으로 수출이 중단되고 인초 국내제품의 사용 회피 및 판로개척의 미흡으로 사양(斜陽)길에 접어들었다.

1969년부터 뜻하지 않은 진양호(晉陽湖) 댐 건설로 본면민의 진주생활권 거리가 멀어지고 교육, 교통이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전 면민이 옛길 찾기를 주장하고 건의하여 진수대교를 2000년 11월17일 준공 개통하였다.

1970년 4월 새마을 운동으로 인하여 면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잘살아 보겠다는 긍지(矜持) 속에 가정이나 마을의 모습이 탈바꿈이 되어 주민소득이 높아지고 보릿고개가 없어지게 되었다.

1980년도부터 소득증대의 일환으로 딸기재배를 권장하여 농가소득의 주소득원으로 기여하여 농촌 경제가 밝아질 전망이다.

1991년 3월 지방자치법이 30년만에 소생되어 기초의원 선거에서 초대의원으로 민병철의원이 당선되고 2, 3대는 황경규의원, 4대는 강석중의원, 5대는 강석중 · 김구섭의원, 6대는 심현보 · 박성도 의원이 선출되어 역임하고 있다.

수곡면 법적 리동은 8개리 행정리는 25개리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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