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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동(大安洞)

본시 진주군(晉州郡) 대안면(大安面) 1洞?중안면(中安面) 3洞?성내면(城內面) 4洞 지역이다. 1914년 3월1일에는 이들지역 각 일부를 통합하여 진주면(晉州面) 대안동(大安洞)이라 하였다. 1932년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식 지명으로 개칭되어 영정(榮町) 이라 하였다. 1949년 8월 15일에는 다시 대안동으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설시장(公設市場)

대안동 동쪽에 있는 시장이다.

옥터

큰골목 동쪽에 있는 길 말한다.

큰골목

대안동 중앙에 있는 길을 말한다.

종로

문화방송 앞 건너편 도로에서부터 중앙공설시장 사무실 근방에까지의 번화가를 종로라 일컫는다.

평안동(平安洞)

본시 진주군(晉州郡) 대안면(大安面) 1洞?2洞?중안면(中安面) 3洞 지역이다. 1914년 3월1일에는 이들 지역 각 일부를 통합하여 진주면(晉州面) 평안동(平安洞)이라 하였다. 1932년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식 지명으로 개칭되어 금정(錦町)이라 하였다. 1949년 8월 15일에는 다시 평안동(平安洞)으로 환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추수말(추수마을) 추수마을은 추수(秋收)라는 마을의 이름이다. 1930년 이전까지는 진주면 평안리 구역 안에 있는 마을 중의 한 마을이다. 현 평안동 북반부 서편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추새미 평안리 시대에 농청(農廳)이 있는 추수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샘을 추수새미라고 하였으며 주려서 추새미라고 불리었다. 6.25 사변으로 인하여 황폐화된 진주시가지를 수복후 신도시계획으로 재건설을 추진함에 따라 추새미는 도로상에 위치하게 되므로 부득이 폐정(廢井)하게 되었다. 당시의 평안동 유력자인 한용관(韓用官).박종렬(朴宗烈).김광철(金光哲) 등이 평안동민은 물론 인근 동민들 까지 식수로 하는 새미를 폐정되는 것을 방관할 것이 아니라 더욱더 상수도 시설이 미비하고 불충분한 때인지라 식수와 화재소방수원을 확보 할 필요성을 통감하여 진주시와 협의 끝에 환지(換地)를 받아 1959년 새로이 굴정(窟井)을 하게 되었고, 굴정한 추새미의 앞단 우측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새로이 굴정한 추새미는 매년 백중날이 되면 동민들이 성금을 모아 새미를 준설(샘치기작업) 하고, 작업이 끝나면 간단한 제(祭)를 올린 다음 한바탕 농악풍물을 울리며 자축기원(自祝祈願)을 하였는데, 이 풍습은 몇해동안 계속하다가 각가정 수도시설의 확충과 더불어 복잡한 교통관계로 인하여 자연히 폐정하게 되어 현재는 콘크리트 뚜껑을 하여 보전중이다. 폐정 이전까지는 매년 백중날에 새미를 치고 농악을 울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추수물 추새미의 물을 추수물이라고 불리워 졌는데 추수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새미물이 라고 하여 추수물이라고 한 것이라 추정된다. 추수동리 사람들이 모두 추수물을 식수로 하고 또 추수새미가 추수말의 중심부에 위치한 관계로 추수물(水)과 추수마을(里)이 혼용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추새미 골목

추새미 골목은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옛날에 추새미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연결된 골목길을 모두 합쳐서 말하는 것과, 원추새미를 중심하여 남북으로 연결되는 골목길을 추새미 골목이라 부리기도 한다. 이 골목길이는 약 150m쯤 된다. 옛날의 추새미골목은 대부분 신시가지의 대지(垈地) 또는 도로에 편입되었고, 현재 기존하고 있는 골목은 비록 짧은 골목이나마 옛날을 회상할 수 있는 유일한 골목이다.

장대동(將臺洞)

본시 진주군(晉州郡) 성내면(城內面) 4洞?대안동(大安洞) 1洞?2洞 지역이다. 1914년 3월1일에는 진주면(晉州面) 동성동(東城洞) 이라 하였다. 1932년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식 지명으로 개칭되어 앵정(櫻町)이라 하였다. 1949년 8월 15일에는 장대동(將臺洞)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섬등

본동 남쪽에 있는 터이다. 삼각주가 있어 섬등이라 했는데, 택지 조성사업으로 없어졌다.

제방

본동에 있는 둑으로 1899년 남강의 침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샇았다. 1935년 대홍수로 반판된 것을 보수하였다. 지금은 시가지로 변하였다.

봉래동 지명유래

동산고개

동산골로 가는 고개로서 금산과 봉래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길의 옛날 이름이다.

동산골

현재 봉래초등학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새미골

봉래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잇골

비봉산 동쪽 골짜기 이름이다. 이 골짜기에는 의곡사가 있다.

호박새미

봉래초등학교 서쪽 골짜기에 있는 샘이다.

수정동 지명유래

갈키(갈길)

갈로서 돗자리 등을 만들었던 거리란 이름으로 옛날에 이 거리에 돗자리상가가 있었다고 한다.

나무전거리

시내 장대동·평안동·수정동 사이의 지점이다. 옛날부터 나무전으로 땔감을 파는 장소였다.

장새미골목

지금 어린이 놀이터 남쪽 근처를 이른다. 장새미란 이름은 조그마한 샘이었는데 그 샘이 마치 간장처럼 짜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그 뒤 이 마을은 그 샘터를 기점으로 아주 긴 골목길이 있었으나 6·25 사변 이후 도시계획으로 그 길다란 골목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새미터

본동 남쪽에 있는 우물터이다. 길이 나면서 메워졌다.

옥봉동

사이고개(씨앗고개)

사이고개(씨앗고개)의 전설은 다양하지만 몇 가지만 소개코자한다. 이고개 위치는 구옥봉남북동 경계지역으로서구 옥봉남동 1통, 옥봉북동 1통·6통 지역을 말하며 "보리당 북쪽 고개", "사이고개", "무명 씨앗까는 고개"라고 한다. 향교쪽에서 시내쪽으로 넘어오는 고개는 "씨앗고개"라 했고, 시내에서 향교쪽으로 넘어가면 "떡전골 고개"라 했다. "보리당 고개"라고도 한 말은 고개 모양이 보릿대를 쌓아둔 뭉치처럼 생겼다고 하여 "보리당"이라 하였고 또한 "보리당고개"라고도 하였다. 또 나막신을 신은 자가 얼어죽은 고개라 하여 "나막신 짝 고개"라 하지만 그 유래는 희미한 전설로 간혹 거론되고 있다.

섣달 스무 이튿날 나무로 만든 신을 신은 소금장수가 이 고개를 넘다 매우 추워서 동사했다는 뜻인데 그 연도와 장소는 확실하지 않다.

피병터(被病터) 및 타작마당

구 옥봉북동사무소에서 도덕협회(옥봉동 471-14번지) 부근을 "피병터"라 하였다. 병든자를 모아 수용했다 하여 "피병터"라 하며 곡식을 모아 도리깨로 타작한 큰 마당(터)이라 하여 "타작마당터"라고도 한다. 이곳의 이창균씨(일제시대때 비행사) 집 부근에는 대밭이 있고 피병터 우물샘은 지금도 남아있다. (옥봉동 471-14). 그리고 수양버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으며 시내에서 죄 지은 자를 모아 은행나무에 매달아 곤장도 치고 매질하는 곳이기도 하며 현재 은행나무도 1970년대초에 건립한 국제도덕협회안에 지금도 살아있다. 피병터와 타작마당의 사용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1910년부터 1937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호박샘

위치는 구 옥봉북동 402-2번지로 지금은 씨앗고개 도로개설로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상기 번지 바로아래 호박샘이 있었다. 그 유래는 산에서 비륵틈을 타고 내려와 호박 모양으로 생긴 웅덩이에 고인물을 동네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였고 도동 사람들이 고개를 넘을 적에 갈증이 나면 바가지에 두 번씩 마시고 고개를 넘었다 하여 "목마른 샘", "오막샘 고개"라고도 하였다.

병사마당

구 옥봉북동 6통 보리당 앞마당으로 지금은 뚜렷한 명칭이 없으나 6. 25동란시 군인 3개 중대가 주둔하였고 땅굴도 3개가 있어 1개 중대씩 땅굴에 주둔하였다 하여 "병사마당"이라고 하며 또 "늙은 마당"이라고 하나 그 유래는 토지주인이 자주 바뀌고 오랫동안 집이 들어서지 않아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향당골(일명 강당골)

위치는 구 옥봉북동 343~350번지 일원이며 향교사학도가 모여서 논의도 하고 시도 읊는 향교 강당이 있는 곳이며 산에서 맑은 물이 골을 타고 길게 흘러내려 여름철의 피서지가 되었고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였다. 또 여름철에는 젊은 남녀가 약속하여 목욕하면서 연예를 하던 곳으로 유명했으며 일명으로 "서재" 즉 "강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강당골"이라고도 불리워지고 있으나 향당골이 정확한 옛 명칭이 아닌가 생각된다.

동산골

위치는 봉래초등학교 후문에서 현 향교앞까지이며 동쪽 산아래 골짜기를 말하고 사학적 용어로는 의병로라 하며 요즘은 22번 시내버스가 다닌다고하여 22번도로라고도 한다. 그리고 옛날 동산골에는 진주시내 엿장수가 집단으로 살든 곳이며 말수레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말티고개

위치는 옥봉동 삼거리 위에서부터 초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소나 말을 타고가다 정자나무 밑 주점에서 쉬었다가 가는 고개로 주점이 많았다. 소나 말을 타고 넘는다 하여 말티고개라 하였으며 소나 말을 팔고 가다 말티고개에서 소판 돈을 빼앗는 초저녁 강도가 많아 혼자서는 넘지 못해 둘 이상 모여 흉기나 몽둥이를 가지 고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진양지』 권4에 의하면 "마현에 길을 낸 뒤로는 인재가 점점 그전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

의병로

향교 앞길로서의병이 많이 다니는 곳이며 대. 소인을 막론하고 향교 앞을 지날때는 말에서 내려 고개숙여 지났다고 함

안골

위치는 옥봉동 1, 3, 4통 말띠고개의 아래쪽 기슭에 있는 긴 골짜기이다. 양쪽산에 둘러싸여 여자의 몸체와 같다하여 안골, 옥수(玉水)마을이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논, 밭이 3분의 2를 차지했고 산비탈 초가집들에는 체(소나무로 만든 곡식을 치는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 많았고, 물을 퍼는 두레박 만드는 가구도 많았다. 주로 호남사람들이 정착하여 많이 살든 곳인데 지금은 논, 밭이 주거지역으로 변했다.

둑맥기

장대동과 옥봉동의 경계에 있는 인위적으로 만든 방수용 둑이다. 지금은 없다

뒤벼리

진주의 승경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광무(1899)판 『진주군읍지』상의 「진주군지도」에는 적벽(赤壁)이라고 하였는데, 뒤벼리 입구에는 아래와 같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진주성의 동쪽 기슭을 흘러가던 남강물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휘돌아 흐르면서 병풍을 두르듯 깎아지른 절벽이 강줄기를 따라 절경을 이루니 금강산의 오묘한 풍치를 연상케 한다. 높이 수십 척에 이르는 절벽이 짙은 남강의 물빛을 받아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으며 여가를 즐기는 강태공들의 한가로운 모습은 이곳을 찾는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봄이면 복사꽃 만발하여 벼랑을 수놓고 가을이면 단풍이 다시 단장하니 이곳을 구경하지 않고 진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진주를 찾는 풍류객이나 관광객은 반드시 찾게되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선학재

동에서 상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안골소대기

본동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안골소대기새미

안골소대기에 있는 우물이다.

옥봉고랑

안골소대기 북쪽에서 남강으로 흐르는 내를 이르는 말이다.

보리당

은열사 뒤의 작은 산을 일컫는다.

수정산

지금은 금산(錦山)이다. 북쪽 봉우리를 수정봉(水精峰 : 水晶峰)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수정동(水晶洞) 동명은 여기의 수정에서 연유한 것이다.

순천봉

본동 동쪽에 있는 산이다.

영계재

본동 동쪽에 있는 재실이다.

수정봉(水晶峰)

본시는 수정봉(水精峰)이라 하였다. 1932년 지금의 수정동(水晶洞)이 수정정(水晶町)으로 작명된 것은 여기에서 연휴한 것이다. 그리하여 수정봉(水精峰)으로 개칭되었다. 지금은 금산(錦山)이라고도 하는데, 1972년 8월 14일자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가야고분으로 알려진 「수정 12호분」이 있고, 동쪽 아래편에는 「수정3호분」이 있으며, 남쪽 봉우리에는 「옥봉7호분」이 있다.

여기의 「수정23호분」과 「옥봉7호분」은 1910년 일본인 세끼노에 의해 발굴 조사되어, 고분의 실측도면과 유물의 사진은 조선총독부 발행(1916)의 『조선고적도보』제3책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중 「수정 2호분」과 「옥봉 7호분」의 출토 유물들은 일본 동경대학 공학부에 수장되어 있고, 「수정3호분」의 유물은 국립 진주박물관에 수장되어 있어, 그 개요은 당시 세끼노에 의해 일본 「고고학잡지(1911)」에 발표된 적이 있으나 우리로서는 그것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1989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논문이 발표되고, 또 이것이 번역되어 1990년 부산대학교 가야통신편집부에 의해 『가야통신』제1920합집에 실려 발표되었다.

이에 의하면 그동안 가야고분으로만 알려진 이 고분군은 삼국시대 이 지역의 지배층 고분으로서 백제계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라 하고, 그 유물 중 일부는 "백제영향"의 것으로 설명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따라서 이 수정옥봉 고분군은 6세기 전반기인 가야말기경 서부경남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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