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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덕촌

뒤벼리에서 도동으로 가는 첫 마을이며 뒤벼리쪽에서 처자골 모퉁이를 돌아 온다하여 모틔라고 하고 또한 모덕촌이라고 불렀다. 일제합방 시에는 모덕촌 마을 세대수는 약 20세대였다고 하며 홍수가 있을 때에는 물이 범람하여 주류강(主流江)으로 흐르는 물과 여류강(餘流江)으로 흐르고 있었다. 주류강은 지금의 상평동 앞으로 돌아서 동북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여류강은 모덕촌 마을 앞에서 상대동 신촌별당마을 앞을 경유하여 하대동-초전동-장재동에서 붕더미 벼랑 밑으로 경유하여 남주류와 합류하는 여강이었다. 이 여강을 마을사람들은 샛강이라고 불렀다.

돗골(猪洞)

모덕촌에서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외편 골은 큰돗골(大猪洞)이며, 오른쪽 골은 작은돗골(小猪洞)이라 불러왔다. 모덕촌에서 큰돗골 안골짝 맛골까지의 길이는 약 1,300m이며, 작은돗골은 길이 800m정도 되는 골짝이다. 큰 돗골과 작은 돗골의 사이 남쪽으로 뻗어있는 능선 중간지점에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산중턱에 진주소씨(晉州蘇氏)의 묘가 있다. 한때 실묘하였다가 복원된 것이다. 모덕촌 사람들은 이 마을을 돼지 사는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석골

모틔마을과 신촌마을 사이에 있는 골이며, 옛날에는 초가집 10여채가 있었다 하며 해방 후에는 골 안쪽에 난민주택 20여세대가 건립되었는데 지금은 50세대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골이다. 옛날 비석골에 들어가는 입구에 큰 비와 작은 비가 4, 5기 있었다고 한다. 그 비로 인하여 비석골이라고 이름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그때의 비석은 없어지고 최근 세워진 삭녕 최씨 시조의 비석과 제각이 있고, 화순최씨 신도비가 있다.

신촌

하대동과 호정촌 사이에 생긴 마을로 별당마을이라고 한다.400년 전에는 이 마을 뒤에 공동묘지가 있었고 주위 산에는 산림이 울창하였다. 옛날에는 초근목피로 생활을 연명하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조선 선조때 조식(曺植) 문하의 최영경(崔永慶 :호는 수우당(守愚堂))이 출사는 하지 아니하고 도동 비석골에 도 강서원(道江書院)을 건립하고 신촌 별당마을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최영경은 선조 22년 정여립(鄭汝立)이 일으킨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옥사당하였고, 비석골 도강서당 뜰에 신도비가 있고, 신촌별당 마을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용수촌

용소촌, 용심못골이라고도 한다. 난민 부락과 호정촌 사이에 있는 부락을 말하는 것으로 하천정리가 되기 전 옛날에 남강물이 범람하면 용소촌 앞에 있는 샛강이 군데군데 깊이 파여져 강이 호수처럼 보이곤 하였는데 그 강물속에 용이 살았다고 하여 용심못골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 마을의 모양이 용 모습과 같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처녀골

상대동 886-1번지에 위치한 조씨 재실이 있는 곳이다. 조씨 경내를 보면 서향으로 서 있는 옥봉정(玉峰亭)이 있고 그 뒤편에 신위를 모시는 경덕사(景德祠)가 역시 서쪽으로 향하여 서 있다. 경덕사 뒤편 약 60m쯤 산을 올라가 전의이씨지묘(全義李氏之墓)라 새겨진 비석이 서있는 무덤이 있는데 함안조씨 17대손 의도(毅道)가 호조참판에 오르기 전 총각시절 전의이씨(全義李氏) 처녀와 혼사가 결정되어 혼례 날짜만 기다리던 중 그 처녀가 죽었다. 의도(毅道)총각이 죽은 이씨의 처녀 시신 앞에 다가서자 죽은 처녀의 위패가 공중으로 날아가 총각의 도복 소매안으로 들어가 이를 본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겨 어떠한 일이있어도 혼백과 혼례를 올려야 한다고 하여 총각은 죽은 처녀의 혼백과 혼례식을 올리고 이씨 처녀의 시신을 여기에 묻었다고 한다. 장사한 후에 밤이되어 앞 남강에서 세숫대야 요강 등 기명(器皿)소리가 나면 조씨가문에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탄생할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처녀가 묻힌 골짝을 처녀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마비

본동과 옥봉을 잇는 길옆에 있다. 단종때의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정분 등 세 분을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호정촌

범돗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호랑이를 잡기 위해 틀을 놓았었다는 전설에의해 지어진 이름으로 신촌과 용수촌 사이에 있는 마을 가리킨다. 선학산의 산능선이 남으로 뻗어있는 능선에 충장공의 3대 묘가 있으며 그 오른쪽 골에는 산림이 울창하여 사람들이 올가미와 덫을 이용하여 호랑이, 살쾡이 등의 짐승을 잡았다 한다. 또 호정촌으로 내려온 산끝부위가 범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범돗골이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하기도 한다. 또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죽은 애일당 충장공 정분의 정승의 묘가 있는데 어느 지사(地士)가 지나가면서 좌청룡 우백호의 산능선이 둘러싸인 명당이라 한 것을 마을 사람들이 듣고 지형(地形)을 용과 범의 이름을 따서 지으면 발전이 있을 것이라 하여 용소촌, 용수촌, 용심못골, 호정촌, 범돗골등의 이름을 다양하게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뒤벼리

벼랑 밑으로 개설된 도로는 도동지구와 시내지역을 이어주는 요충지이다,옛날 인도에는 군데군데 노지돌이 놓여있어 남강물이 범람하지 않을때에는 도동지구 사람들이 주로 이 길을 이용하였고, 돗골 사람들은 신촌 별당마을에서 산능선을 올라 선학재를 경유, 진주시내로 왕래하였고, 하대동 사람들은 서재골에서 선학재를 경유 시내로 왕래하였다 한다. 벼랑의 중간지점에 암반이 평평하게 있는 데 그사이에 수백 년 된 정자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지금은 무속들의 액운을 기원하는 제단으로 변하였다. 정자나무에서 시내쪽으로 40m쯤 나가면 300평정도의 공지가 있는데 방여천(方如天)이라는 사람이 고아원을 건립하여 약 15 년간 운영해오다가 부인이 병사하자 고아원을 폐쇄하고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1991년 4월∼1993년 4월까지 뒤벼리 도로확장공사로 교통난을 해소하고, 벼랑의 낙석을 방지하기 위해 낙석 방지망을 엎어 씌었다.

상대교

자유시장 앞에 있는 진양교와 공단로터리 사이 4차선을 연결하는 다리이며 1968년∼1971년사이 도동지구 제1차 구획정리 사업때 건설한 교량이다.

진양군청터

통합 진주시새청사 부지이다. 진양군은 1970년 5월 16일 진주시 상대동 284번지에 군청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그 후 25 년간 군청사로 활용되다가 1995년 1월 1일에는 법률 제4774호(1994. 8. 3 공포)에 의하여 진주시·진양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진주시가 발족됨에 따라 제2청사가 되었다가 2001년 4월 새로이 단장된 진주시청 새청사로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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