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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리(長安里)

장안리의 유래는 인조대왕이 능양군으로 있을 때 고성에 있는 심부원군 배알차 미복으로 장안산을 지날 때 산세가 수려하여 산중 암자에 국난을 타개하기 위한 기도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 후 동명을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 하여 장안리하고 하였다. 1914년, 진주군 이반성면 후촌동(後村洞), 장안동(長安洞), 반덕동(反德洞), 사령동(沙寧洞), 평촌동(坪村洞) 각 일부로서 장안리(長安里)라 하였다. 장안리는 사령, 반덕, 검정마을로 분리되었다.

진안(鎭安 : 사령)

장안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사령(使令)이라 칭하여 왔다. 마을 명이 천한 명칭이라 하여 1990년 8월부터 마을 명을 진안이라 개칭하게 되었고 그 뜻은 이 마을의 집단 거주 성(姓)씨가 김해김씨인데 이들은 임진왜란 때 충북 진천에서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되었다 하여 마을 명을 진천의 '진' 자와 장안의 '안' 자를 따서 진안이라고 부른다.

존성재

진안마을 중앙에 있는 김해김씨 재실이다.

개리봉

진안 동북쪽에 있는 산이다. 개구리처럼 생겼다 하여 개리봉이라 한다.

바구리등

진안 남쪽에 있는 산이다. 산의 형세가 바구니처럼 생겼다.

장안(長安)

이 마을을 뻔덕이라고 전하고 마을 위쪽은 장안이라고 부르던 중 마을 전체 명을 장인이라고 부른다. 한때 반덕(反德)이라고 하였으나 1990년에 본래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이 마을에는 광양이씨와 밀양박씨가 대성을 이룬다.

성전암

신라 헌강왕 때 창건된 암자로서 조선 시대 인조가 능양군으로 있을 때 백일기도처라 하여 인 조각이 세워져 있다.

강천

장안 동쪽에 있는 내(川)이다.

강천재

장안마을 동쪽에 있는 청송심씨의 재실이다.

군문이

장안 남쪽에 있는 산으로 이곳을 임금이 지난 곳이라 하여 군문이라 한다.

달덩이산(월등산)

장안 동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위에 달이 떠오른다고 하여 붙여진 말이다.

서부실재

검정 남쪽에서 평촌 서부실로 넘어가는 재이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선조의 묘를 파헤치자 소금을 지고가다가 이것을 본 후손이 말리려고 급히 뛰어가다 소금섬을 진채로 둠벙에 빠졌다고한다.

강양이공사적비

검정입구에 있다. 조선조 말엽에 부산첨사를 지낸 이종호의 사적비이다.

일산당(日山堂)

절재사 강양 이종호(江陽 李鍾浩)가 우거하던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편액을 명명하고 시를 지어 주었다.

오봉재(五鳳齋)

장안리에 있다. 강양 이씨가 그의 선대를 위해 창건하였다.오전 10:54

어석령

함안군과 진주시의 경계지점에 있는 고분군(古墳群)이다. 옛날 인조대왕이 쉬었다 간 곳이라 하여 어석고개라고 하였다 한다. 주변에는 5 ~ 6세기경의 고분군이 있는데 곳곳을 살펴보면 도굴된 구덩이가 여러 곳에 보인다. 이 곳에서 발굴된 굽다리접시 3점과 뚜껑 1점은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검정(檢正)

이 마을은 인조가 왕래한 마을로 검아문 또는 군문이라 하였는데 후에 검아가 변하여 검정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의 집단 거주 성씨는 강양(江陽) 이씨와 청송(靑松)심씨이다.

소금산

검정 동쪽에 있는 산이다. 이 산밑에는 소금새미가 있다.

소금새미

검정 동쪽에 있는 둠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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