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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진주 Today
현재 시각 AM 09:03 2019/11/18 Mon

대평리(大坪里)

1914년, 진주군 대평면 대평동(大坪面大坪洞)으로서 대평리(大坪里)라 하였다.

어은(漁隱)

어은 마을은 댐 수몰 이전에는 154호로 대평면 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강폭이 약 300m이상 되는 곳인데 강가에는 수몽석이 즐비하게 깔려있어 경관이 좋을 뿐만 아니라 은어, 눈치, 치사어, 피라미 등 수십 종의 민물고기가 숨어산다고 하 여 어은(漁隱)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밤밭나룻배

수리조합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밭으로 되어 있어 무를 심고 후작으로 보리, 밀을 심었다. 논 면적이 적어 쌀이 부족하기 때문에 밭에 심은 무와 벼를 교환하여 식량을 조달 하였는데 이 무렵 옥종(玉宗), 수곡(水谷), 나동(奈洞), 곤명(昆明), 단성(丹城)면 전역에서 벼와 무를 교환하기 위하여 벼 5, 6석을 가지고 밤밭나룻배로 도강(渡江), 그 뱃삯[船賃]으로 벼를 세홉들이 박바가지로 한 바가지 떠주는데 그 양이 무려 세 석[三石] 내지 다섯 석[五石]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나룻배로 도강한 인원수를 따져보면 하루 1,000명 내지 1,600명이나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 한들 전역이 인파로 변하여 이곳저곳 배회하다가 무이렁을 발로 측정하여 벼 몇 되라고 하면 벼를 주고 무를 뽑아 지고 어전에 오던 나룻배를 건너 고개를 넘어 무를 지고 귀가하는데 그 고개가 워낙 험하여 무를 많이 주면 무거워 욕보이게 한다고 무밭 주인을 욕하고 무를 적게 주면 적게 준다고 욕하는 제매재고개가있다.

한강나들이

어은 북서쪽에 있는 나루터로 남강물이 평소에는 얕아서 인마차(人馬車)가 월강을 마음대로 하던 곳이다. 이 나루를 한강나들이라고 하였다.

안사영보(洑)

조선조 말엽에 한들(大坪) 전 면적이 밭으로 되었을 당시 논으로 전환할 계획으로 안사영이라는 부자가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앞 강 여울에 보(洑)를 축조할 목적으로 돌 한 짐에 엽전 한 닢씩 주고 돌을 져다 모아 보를 축조하고 소남덤(대평리 지역) 밑으로 수로(水路)를 만들어 한들 밭에 물을 대어 논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수로 낼 곳이 워낙 지형이 낮아 실패를 할 무렵 지나가던 도승이 말하기를 소남덤 밑(수로 낼 곳) 물속에 있는 바위가 길 한가운데 오면 통수(通水)가 잘되어 한들 논이 성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지나갔다는 설이 있으며 지금은 그 돌이 길 한가운데 있다.

대평(大坪)

예부터 깊은 골짜기 안에 맑은 물과 넓은 들이 있어 곡식과 채소들이 풍부하였으므로 한들, 혹은 큰들이라 칭함.

가막고개

대평마을 북편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 아래쪽에 위치한 고개이다. 진주에서 산청군 덕산으로 통하는 오솔길로서 그 고개를 갈 때에는 짐을 많이 지지 말라고 가막고개라 부른다.

면애기 고개

명석면 오미리와의 경계에 있다. 고개 맞은편에 있는 산 이름이다. 산의 형국이 면앵(眠鶯)같다고 하여 면애기산을 면애기 고개라고 부른다. 그 산에 명산이 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그 자리를 모른다.

돌고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과 대평면 대평리 대평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오솔고개로서 돌이 많아 돌을 모으는 당산이 있었다. 1950년 6·25동란 후에는 지리산 빨치산부대의 통로로 이곳에서 자수를 하자는 공비와 자수를 거절하는 공비들의 의견충돌로 자수하자는 공비들을 사살한 고개이다. 지금도 그 고개에는 공비의 무덤이 있다.

새령이들

남강으로 인하여 수십 정보의 순모래사장을 이룬 곳으로 사령들(沙嶺野)이하 한다. 그 중에 밭이 약 4만평의 옥토가 되었으나 진양호에 편입되어 모래 채취로 흔적조차 볼 수 없다.

투시동

골의 모양이 선인독서지형(仙人牘書之形)으로 중국시인 자미(自美) 두보(杜甫)가 이곳에 와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애기바위

큰바위 위에 작은바위가 얹혀 있어 마치 아기를 업은 것 같다고 하여 애기바위라고 한다. 큰바위에는 파평윤씨세거지(坡平尹氏世居地)라고 조각되어 있다.

빈대거리

대평마을에 있는 삼거리이다. 상촌 뱃가로 가는 삼거리 이름이다.

종대거리

대평마을 삼거리에 종대(鐘臺)가 세워졌다고 하여 종대거리라고 한다. 그 곳에 시장 (市場)을 건립하여 1952년부터 1968년까지 최번성기에는 3 ∼ 4대의 차량이 상품을 싣고와서 판매, 시일(市日)이 되면 단성, 수곡, 옥종, 명석면, 본면 사람으로 대성황 을 이루었다. 시일(市日)은 1일, 5일 이었다.

옥방(玉房)

댐 수몰 이전에는 131호로 큰 마을이었다. 수리조합이 설립되기 전에는 밭으로 되어 있어 무를 심고 후작으로 보리밀을 심었다. 논 면적이 적어 쌀이 부족하였기에 밭에 심은 무와 벼를 교환하여 쌀 식량을 조달하였다. 댐 수몰로 인하여 그중 78세대는 대평마을 513번지로 집단 이주단지로 이주하였다. 농지(農地)는 전 면적이 수몰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어은, 옥방, 대평 3개 마을은 동일구역 임으로 설명을 생략한다.

남강물이 흐르는 폭(幅) 약 300m를 V자형으로 돌과 솔가지로 강을 막아 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강물 유수량과 기후가 적당하면 봄에는 황어(黃漁), 가을, 여름에는 은어를 수천마리 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강댐 수몰로 지금은 살 흔적도 없다.

옥방1호

문화재 관리국에서 대평리 옥방마을에 와서 문화재 발굴작업을 하였는데 기원전 약 500년쯤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대량으로 발굴하였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조사하여 발굴된 옥방1호 주거지가 곧 그것인데 이 유적지에서는 가락바퀴, 그물추, 흙구슬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석기(石器), 숫돌, 민무늬토기, 구멍무늬토기, 긴목항아리, 겹아가리토기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이 주거지에서 발굴된 민무늬토기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발굴된 것 중 가장 많은 양과 또 완형의 유물로도 유명하다.

옥방2호

옥방2호 지석묘에서는 역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돌칼, 대롱옥, 돌활촉이 발굴 되 어 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평팔경시(大坪八景詩)

일반평야(壹般平野), 명사십리(名沙十里), 용두명파(龍頭明波), 고산명월(孤山明月), 적벽기운(赤壁氣運), 우령락조(牛嶺落照), 초록조하(草綠朝霞), 율리모연(栗里暮煙). 남강댐 수몰이 되기 전에 대평리 광경과 형태를 비유하여 지은 시로서 어느 때 누가 지었는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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