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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풍리(新豊里)

1914년, 진주군 신풍면 상동(新豊面上洞)·하동(下洞)과 중동(中洞) 일부로서 신풍리(新豊里)라 하였다

신풍(新豊)

남강댐으로 수몰이 되기 전에는 신풍, 중촌, 풍호 등 3개 부락이었다. 신풍 141호, 중촌 56호, 풍호 66호, 계 263호였다. 신풍리 사람은 특히 부지런하여 진주시장(晋州市場)을 가면 무, 고구마, 장작 등 한쪽이라도 더 지고 가서 돈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근검한 사람들이라고 이름이 높이 났었다. 대평면 내에서 제일 부유한 마을로서 고등교육도 많이 받아 정계 또는 군인, 공무원·변호사 등 고위직에 많이 진출하였다. 국회의원 황남팔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댐 수몰 전에는 이 지역이 무, 고구마, 참외, 수박 등 특산물 재배로 소득이 높았으며 특히 이 지역이 무, 고구마, 참외, 수박 등 특산물 재배로 소득이 높았으며 특히 이 지역은 무 종자 산지로 당촌리 다음 가는 많은 량인 150가마(72㎏입)를 채종(採種)하여 소득이 높았던 곳이다. 100여 정보의 옥토가 지금은 완전히 수몰되어 물버들이 우거지게 꽉 들어서 있어 완전 폐허가 되었다. 신풍은 진주시 서쪽 약8㎞에 위치한 마을로서 상촌, 중촌, 하촌 3개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상촌은 새드랑, 늪골, 대죽골로 형성되어 동쪽은 진주시 판문동, 북은 명석면 오미리·가화리로, 서쪽은 대평면 상촌리·하촌리·당촌리로서 남강을 격하여 접경을 이루고 동북 지방은 해발 300m거리의 진주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촌(下村)은 중촌에서 500m 떨어져서 명석면 가화리에 접하고 있다. 남강이 신풍리 전 지역을 에워싸고 흐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신풍리의 교통은 좋지 못하였다. 남강댐 공사로 신풍리 평야지대가 전부 수몰되었다. 예로부터 신풍은 납대라 불리었지만, 언제부터 납대라고 하였으며 어느 때부터 신풍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250년 전 신와공행장기(愼窩公行狀記)에 회와공시거우신풍(晦窩公始居于新豊)이라는 기록문을 볼 때 250년 이전부터 신풍의 마을명은 틀림없다. 신풍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고려조 이전으로서 70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신풍은 주민의 전 호수가 30호 내외에 불과 하였으나 회와공이입신풍후 100여년이 지난 뒤에 크게 번영하여 신풍에 살고 있는 창원 황씨가 240여 호, 다른 성이 20여 호 합쳐서 263호 되었으나 남강댐 수몰로 지금은 17호에 불과하다.

대죽골

신풍리에 있다. 옛날 신인(神人)이 소를 몰고 이곳을 지나갔다는 전설이 남아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대죽골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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