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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3·1만세운동①-‘진주와 서부 경남 3·1운동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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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03-05
기자 :
김종신
조회 :
33

삼일운동발상지1.jpg

★대체텍스트필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헌 헌법은 물론이고 현행 헌법 제1조에 새겨진 이 조항에는 3·1운동(삼월 대혁명) 이후 우리 민족이 흘린 수많은 피와 땀이 녹아 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당시에도 대한제국 황제가 권력의 유일한 주체였다. 불과 9년 뒤 일어난 3.1운동을 계기로 인민(人民)이 주권자인 대한민국으로,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일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자주독립의 의미와 함께 국민이 주권이라는 의식의 변화를 불러왔다.

 

106년 전 오늘, 식민지 조선의 백성 모두가 떨쳐 일어나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독립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공화정으로 나갈 기반을 마련했다.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며 먼저 ‘3·1운동 발상지부터 찾았다.

 

말티고개 아래 중부농협 로컬푸드 판매장 근처 교차로에서 집현면 사촌리와 상봉동 쪽으로 100m 정도 가면 하촌동(드무실) 입구가 나온다.

 

입구 마을 정자를 지나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마을회관 에어컨 실외기 옆으로 작은 표지석이 나온다. 표지석에는 <3·1운동 발상지 기념비>라 적혀 있다. 기념비에는 진주와 서부 경남 3·1운동 발상지. 의논 장소. 순국 지사 김재화 생장지라는 글도 새겨져 있다. 진주 지역에서 3·1 독립 만세운동을 처음 결의한 곳이다.

 

19193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지역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3월 초순 여러 지역으로 확산하여 경남 지역에서는 311일 부산에서 처음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13일 동래·창녕·밀양, 14일 의령, 17일 함안, 18일 진주·합천·통영·하동으로 퍼져 나갔다.

 

다른 지역보다 만세 시위는 늦었지만, 천민 신분이던 걸인과 기생들도 시위에 참여했던 진주 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김재화, 박진환, 심두섭 등이 고향인 진주로 내려와 집현면 김재화의 집에서 권채근, 강달영, 조웅래, 정용길 등과 비밀 회합을 하고 313일 하기로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13일 아니라 18대한 독립 만세소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10일 새벽에 왜 삼남에는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격문이 시내 곳곳에 붙어 일본 제국주의 경찰의 검문과 경계가 강화되며 18일 장날로 미루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진주 3·1운동거사를 모의하고 교유문을 작성하여 시위 때 배포하는 등 만세 시위를 총지휘했던 김재화(1899.7.7~1920.4.15)189277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집현면(集賢面) 하촌리(下村里)(현 진주시 하촌동) 에서 태어났다. 1919년 진주 만세 의거 첫날 붙잡혔다. 19196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 형이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형 집행이 정지되어 1920329일 풀려났으나, 1920415일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2535일 시민명예기자 김종신(하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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