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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3·1만 세 운동③-‘진주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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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03-07
기자 :
김기대
조회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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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지금도 오히려 진정이 안 되고 자꾸 소요가 일어날 형세가 있는데, 19일은 진주 기생의 한 떼가 구 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 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 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있다더라.”

 

일본 제국주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19325일 자 진주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위와 같이 보도했다.

 

191931일 울렸던 대한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에 퍼져 나갈 때 진주는 상대적으로 늦은 18, 그날의 뜨거운 함성이 울렸다. 다른 지역보다 만세 시위는 늦었지만, 천민 신분이던 걸인과 기생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진주 3·1 만세운동은 318일 정오에 진주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다섯 군데에서 만여 군중이 동시다발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만세운동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19일 진주 읍내 한국인 상점은 모두 철시했다. 오전 11시경 다시 7천여 명 군중이 모여 악대를 선두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당시 경남도청이 있던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일제 헌병은 총검으로 위협하고 난타하여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은 시위 민중은 투석으로 이에 맞서는 등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때 진주 기생 50여 명이 기생독립단을 결성하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우리는 자랑스러운 논개의 후예이다. 진주 예기(藝妓)의 전통적인 긍지를 잃지 마라!”며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시위는 그날도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경찰은 한금화 등 6명을 붙잡았다.

 

감옥에 갖혀서도 당시 22세였던 한금화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혈서를 썼다.

 

한편, 진주 3·1 만세운동에는 걸인들도 참여했다. ‘걸인독립단이 만세 시위 현장에 나타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202537일 시민명예기자 김종신(하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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