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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현(黃玹) 선생】
(1855. 12. 11 ~ 1910. 9. 10)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황현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55년 전남 광양에서 부친 황시묵과 모친 풍천 노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재주가 뛰어났으며, 왕석보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878년 처음 상경하여 이건창·김택영 등과 교유하며 장안에 문명을 날렸다. 1883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시골출신을 차별하는 당시 관료사회의 풍토에 실망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낙향한 후 전남 구례 월곡마을에 은거하며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동비기략(東匪紀略)」등의 저술에 힘썼다.
초야에 묻힌 선비였지만 선생은 항상 나라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우국의 심정을 갖고 살았다. 그리하여 1899년 「언사소」를 조정에 올려 부정부패를 해소하고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시 철도부설권·금광채굴권 등 각종 이권이 부패한 황실과 관리들에 의해 남의 나라에 넘어가고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선생은 선비로서 행동하는 양심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문변삼수(聞變三首)」라는 시를 지어 을사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다.
나아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나라를 섬 오랑캐에게 빼앗기고 겨레는 그들의 노예가 된 것이었다. 이에 선생은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긴 채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1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10월의 독립운동가「정영필」선생】
1. 개요
유공자명 |
생몰연월일 |
서 훈 |
운동계열 |
출신지 | |
훈 격 |
연 도 | ||||
정찬진 |
1905.6.14-1992.9.2 |
애국장 |
1990 |
일본방면 |
통영 |
1923년 일본 동경(東京)에서 원심창(元心昌)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항일결사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고 동흥노동조합(東興勞動組合)을 통하여 무정부사회의 실현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1924년 7월 일제는 동경에 유학중이던 한국인 학생을 기숙시켜 통제하기 위하여 동경 중야구(中野區)에 계림장(鷄林莊)을 세웠는데 이때 그는 많은 학생들과 이곳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5월 14일 흑기노동자연맹(黑旗勞動者聯盟)을 결성하고 재일한국인 노동자들을 결집하여 사회주의와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편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투쟁하였다.
1932년 8월 동흥노동동맹사무소의 철거문제로 민흥규(閔興圭)와 함께 피체되어 1932년 11월 29일 소위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33년 일본공사 유길명(有吉明)을 주살하려던 백정기(白貞基)·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 등이 장기(長崎)에 압송되어오자 그들을 위한 구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