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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산(將坮山)은 집현면내에서 집현산(集賢山) 다음가는 산으로 봉강리(鳳降里)에 소재하고 있다. 장대산은 외부에 널리 알려진 산은 아니지만, 이 산에 얽힌 전설과 유래, 설화 등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옛날 나라에 불행한 일이 닥치면 장대산이 울거나 춤을 추었다고 한다. 도대체 산이 어떻게 울고 춤을 추었을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외침(外侵), 내란(內亂), 국상(國喪), 대흉작(大凶作) 등 나라에 불길한 징조가 보일 때면 장대산이 떨면서 "우릉 우릉"하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한다.
또한, 장대산의 신령(神靈)이 여신으로 둔갑하여 밤새 긴 치마꼬리를 날리면서 골짝을 누비다가 봉황골의 첫 닭이 울면 난무(亂舞)하던 여신의 흔적이 흔적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봉황골과 장대산 사이의 골짝을 여신의 난무와 연결지어 '첫닭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처럼 장대산에 얽힌 이야기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지명유래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덕곡마을에서 장대산을 눈앞에 두고 봉황골로 넘어가는 소릿길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덮고개라 부른다. 옛날, 이 고개에는 칠송지(七松枝)라고 하는 큰 소나무가 서 있었는데, 사시사철 그 소나무 일곱 가지가 고개를 덮고 있다 해서 덮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덮고개 오른쪽으로 좁은 골짜기를 부무골(浮舞谷)이라 하는데, 이 부무골 역시 장대산의 여신이 난무(亂舞)할때 그 춤바람이 이 골짝까지 스쳐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대산의 정기(精氣)를 이어받아 이루어진 마을이 봉황골이다. 그래선지 봉황골은 예부터 유서깊은 곳으로 인식돼 왔다.
'봉황골(鳳凰谷) 뒷산에 봉(鳳)이 내렸다' 라는 신비스러운 말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곳이 바로 봉황골이다. 우리 조상은 무덤(墳墓)이나 고분(古墳)의 자리를 정할 때, 그 주변의 지리적 환경조건을 고려하고 자리를 쓰는데 봉황골 뒷산에는 조선 시대 것으로 추측되는 고분이 소재하고 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장대산의 지맥(地脈)이 봉황골 뒷산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했기 때문에 이곳에 고분을 썼을 것이라는 예상도 제기되고 있다.
몇 년 전 봉황골 뒷산에 아파트를 세울 때 굴착기로 고분을 파헤쳐 보았더니 그 속에서 많은 토기(土器)가 출토되었다.
전문가들이 발표한 바로는 이 토기들은 조선 후기의 토기로 사료적인 가치는 적은 편이라는 결론을 끌어냈으나, 지금은 애석하게도 그 고분은 없어지고 광(鑛)터라는 이름만 남아서 전해올 뿐이다.
지명유래뿐 아니라 장대산은 봉강(鳳降)지역의 각종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조선 시대 신당서원 지족당의 증손인 봉강선생(鳳崗先生)이 봉황골에서 한평생 살았다는 기록이 임천조씨(林川趙氏) 족보에 실려 있으며, 일제 강점기 진주에서 만석꾼으로 이름난 정양선이 봉황골에 재실을 짓고 봉강재(鳳崗齋)라 하였다.
이 같은 사실들을 볼 때 봉황골을 기반으로 해서 장대산의 정기를 이어받고자 했던 풍수 지리적인 관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게 주민의 의견이다.
장대산은 그 능선이 북쪽으로 길게 늘어져서 봉황골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봉황골에서 장대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을 능선이 길다는 뜻에서 진등재라고 부른다.
김현욱(전내무부장관)이 어릴 적에 드무실(지금의 下村)에서 산길을 따라 장대산 허리를 질러 진등재를 넘나들면서 당시 집현국민학교(4년제)를 다녔고, 고 남인수가 가수가 되기 전 청소년 시절에 장대산 골짝으로 지게목닥을 두들기면서 나무(땔감)를 하러 다녔던 이야기도 전해 온다.
장대산이 집현면에서 가지는 가치는 비단 지명유래의 근간이 되고, 인근 마을 주민의 정서(情緖)의 밑바탕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집현발전의 중심이 되는 곳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장대산은 옛날 물 대란으로 천지개벽을 할 때 부근의 야산(野山)은 모두 침수되었는데 장대산만이 산봉우리 끝이 잔대(술잔의 받침대)만큼 남아 장대산이라 불렸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제보자: 전 집현면장 주수도·봉강리장 김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