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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안동

진영지(鎭營池) 터

진영못, 또는 대사지(大寺池)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중안배영교 앞 일원과 진주경찰서 일원이었다. 이 못은 자연적인 것인지, 또는 인공적인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어떻든 진주성을 방호하는 성지(城池)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제는 그들의 강점 기간 중인 1939년까지 이 못은 매축하면서 진주성 외성 모두와 내성 일부를 헐어 여기의 매축공사에 충당하였다. 구한말 때까지 안쪽을 내성이라 하였고 그 북쪽을 성 밖이라고 하였다.

낙육재(樂育齋)터

중안동 4번지 지금의 도립 진주의료원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본시 토포영(討捕營)이 있었는데 고종31년(1894)에 있은 이른바 갑오경장으로 신정부관제의 제정에 따라 좌우포도청을 합하여 경무청을 창설하고 이를 내무아문의 관할에 속하게 함으로서 토포영이 폐지되었다.

고종32년(1896)에는 다시 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종래의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건양원년(1896)에는 다시 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종래의 경상도가 남북도로 분리됨으로서 진주는 경상남도의 수부가 되었다.

한편 앞서 고종 32년(1895) 7월 19일자 칙령 제145호의 소학교령에 의하여 진주성 내 진주관찰부 부속건물에서 교원 2명. 생도20명으로 경남도내에서는 최초의 공립진주소학교가 개교되었다.

이 무렵 진주는 경상남도의 수부가 됨에 따라 진주의 유생들은 영조 때부터 대구에 있던 사림(士林)들의 고등교육기관인 낙육재를 나누어 유치키로 하고 이를 학부에 호소하여, 낙육재의 소유이던 밀양에 있는 3백 5-6십 석 정도의 벼를 거둘만한 토지를 지용(支用)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문학으로 덕망 있는 사람을 재장으로 선출하고 각 군에서 재지(才智)있는 준수(俊秀)를 모아 가르쳤다. 그리하여 낙육재는 구한말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로인해 광무10년(1906) 진주에 통감부 이 사청 지청을 둔 일제는 낙육재를 폐쇄하고, 촉석공원에 공립소학교를 낙육재로 옮겨왔다. 그러나 이마져도 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한 다는 구실로 당년에 타절(打切, 일제가 표기한 말) 되고 말았다.

융희4년(1910) 4월에는 낙육재를 보수하여 진주공립실업학교가 개교되었다.

1911년 11월에는 진주공립농업학교로 개칭되고 1921년 5월에는 천전리의 신축교사로 이전되었다.

1923년 3월에는 대지 4,046평, 건평 567평으로 도립 진주의원이 신축하였다.

그리하여 낙육재 자리는 이래로 도민의 의료 시혜를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

계동

진주관아(晋州官衙)터

계동 38번지 일대. 지금의 한국통신 진주전화국이 있는 그 일대이다. 이곳에는 본시 진주목. 진주군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목사. 군수의 집무 청인 상대청(上大廳)에는 동헌(東軒)과 서헌(西軒)이 있었는데 각각 상방(上房)이 있었고, 중대청(中大廳)에는 낭청방(郎廳房).서낭청(西郎廳)과 교방(敎房)이 있었다. 객사(客舍)는 지금의 문화방송국이 있는 곳에 있었고, 봉명루(鳳鳴樓)는 그 남쪽에 있었다.

고종32년(1895) 5월 26일에는 칙령 제98호에 의거 태종13년(1413) 이래로 482년간 시행해 오던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로 구분하여 그 아래로는 군이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였다. 그리하여 진주에는 진주부가 설영되어 관찰사를 두고, 진주목을 진주군으로 개칭되어 군수를 두었다. 그리하여, 진주관찰부는 진주성내의 우병영에 설영되고, 우병영은 구. 금성초등학교 자리로 옮겼다.

그러나 이러한 23부제의 지방조직은 다음해인 건양원년(1986) 8월 4일자 칙령 제35호로 이를 폐지하고, 동일자 칙령 제36호로 다시 전국을 13도로 개편하여 각 도에는 관찰사를 두었다. 그리하여 진주관찰부는 경상남도 관찰부로 개편되었다. 한편, 진주군은 구한말 현재 50면 298리동을 소관 했는데,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19면 148리동을 소관 했다.

1939년 10월 1일에는 부령 제168호(1939. 9.30 공포)에 의하여 진주 읍은 진주부로 승격되어 부윤을 두고, 진주군은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진주부는 지금의 구 진주시청 자리에 있었고, 진양군은 예대로 지금의 전화국 자리에 있었다.

1968년에는 군청사의 협소로 상봉동 1018-3번지의 임시청사로 옮겼다가 1970년에는 지금의 상대동 284번지의 신축청사로 이전하였다. 이와 같이 진주관아는 그 설치 상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생각건대 천년 이상의 세월동안 진주 행정의 근원지가 되었던 곳이다.

봉곡동

개자리못터

지금 서부시장 맞은편에 있던 못자리로서 현재는 시내 중심가로 변모하였다.

새동네

본동 오죽광장(속칭 국제로터리) 동남쪽 지역에 1971년 택지조성 이전까지는 10여세대가 사는 마을이었는데 이 마을을 새동네라고 하였다. 논들로 둘러싸였던 마을이다.

지녕못터

새동네에 있는 길. 전에는 개자리 못이 있었다.

엄뚝(堤防)

지금의 인사동 종합사회복지회관 앞부터 봉곡광장까지의 긴뚝(上幅 3m정도)이 있어 시내일원에 홍수를 막는 큰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뚝 양쪽에 벚꽃 나무가 길게 심어져 있어 봄철에는 벚꽃이 만발하여 경치가 아름다웠으며 여름철에는 나무그늘이 시원한 곳이어서 주민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또, 명절에는 이 둑에서 민속놀이 등으로 주민들의 정서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병자년 대홍수 때 이 둑이 터져서 시내가 물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그 후 곧 보수가 시작되었으며, 1952년경 나불천제방이 축조된 후 해체되었다.

농쟁이마당

일명 타작마당이라고도 한다. 봉곡동의 서부지역 일대가 택지조성 전에 농경지(전답)이었으며 약 70년 전 현 서부시장 근처에 약 1000평정도 넓이의 타작마당이 있었는데 농작물수확기에는 이곳 마당에서 타작도하고 명절이면 씨름과, 줄 싸움 등 다양한 민속놀이를 하는 등 다목적으로 사용한 유명한 마당이었다.

도마다리(石板橋)

옛날 진주교도소 자리(현 한주아파트) 앞에 흐르는 개울이 있었는데 그 개울을 건너는 돌다리를 당시 김봉구씨가 놓아 기증하였다 하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 다녔다는데 이 다리의 구조가 상부에 석판이 걸쳐져 있어 마치 도마와 같은 모양이라 하여 세칭 도마다리라 불리웠다 한다.

유젖짠몬당(牛乳짠몬당)

현 서부농업협동조합 뒤쪽에 구 산청, 함양도로 남쪽편 경사진 몬당에 약 60여 년 전 일본사람이 젖소를 기르고 우유를 짠 곳이라 하여 유젖짠몬당이라 하였다.

논머리샘(井)

현 봉곡광장 서쪽(봉곡동 24-16 부근)에 샘이 있었는데 이 샘에서 나는 물이 맑고 물맛이 좋으며 여름이면 아주 차고 투명하여 인근 동리 주민까지도 유일한 식수원으로 유명한 샘이었다고 한다. 논머리란 뜻은 논 어귀에 있었다하여 논머리 샘으로 불리었다.

제 3 야학교

약 60년 전부터 일제 강점기에 진주시내에는 제 1, 2, 3 야학교가 있었는데 1, 2 야학교는 다른 동에 있었고, 제 3 야학교는 현 중안초등학교와 배영초등학교 사이길 에서 비봉산 쪽으로 약 300m지점 (봉곡동 13-18번지) 인 곳에 있었으며,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에게 야간교육을 시켰으며 학생 수는 약 200명 내외이고 졸업인 야학교로서 해방 후까지도 운영되었다고 한다

개자리못

현 봉곡동 15번지 일대에 폭 약 50m 길이 약 150m 크기의 연못이 있었는데 이 못이 일명 개자리 못이었다고 한다. 이 못은 옛날 도립의료원 앞에 있던 진영 못과는 다른 것이다.

조상거리

현 중안초등학교 북편 상봉동으로 가는 길로 중안동과 봉곡동의 경계지역에 옛날 마을길이 있었는데 그 길가에 조약돌을 쌓아 모아놓은 곳이 있어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이 조약돌을 주워 던져 행운을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이 길을 조상거리라 불렀고, 길 건너편에 샘이 있었는데 조상샘 이라고 하였다.

기와공장과 정미소

현 서부단위농협 건너편 봉곡동 10-8번지에 기와 굽는 공장과 그 옆에 정미소가 있었는데 김용필씨가 경영하였다고 한다. 기와공장은 해방 5년 전에 사라지고 정미소는 해방 후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학생운동의 발상지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에 이어 진주에서도 학생운동이 있었는데 발상지가 현 봉곡동사무소 뒤편인 봉곡동 12-9 번지에 당시 정봉욱 아래채에 학생들이 공부하는 공부방(속칭 초롱공부방)에서 진고·진여고 학생 15~20여명이 공부를 하고 있으면서 최초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서부시장

본동 내에 있는 서부시장은 1955년경부터 형성되었으나 시장의 규모는 아주 적고 재래식으로 농촌시장 형태였다. 그러다가 1974년 10월 30일 현 위치인 봉곡동 31번지에 시장면적4,646.3㎡지상에 2,274㎡의 단층건물을 지어 156개의 점포와 매장면적2,062.47㎡ 규모의 시장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서부시장 상사가 시장현대화 계획으로 재건을 추진 중이므로 곧 고층 현대 시장으로 바뀌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죽광장(梧竹廣場)

봉곡동 관내 광장(로타리)이 2개소 있으나 그 하나는 동명을 따라 봉곡광장이고 다른 하나는 서부 쪽에 있는 오죽광장이다. 이 광장은 국제 로터리라고 잘못 불리기도 한다. 이 오죽광장의 명칭은 1979년 3월 5일 지어졌으며 梧竹이란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일컫는 것으로 옛날 이곳에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오동나무숲에서 산다는 봉황새가 서식한 곳으로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일대에 오동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고 하며 오죽광장이란 명칭은 시민의 공모에 의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오죽교(梧竹橋)

본동과 이현동의 경계선에 위치한 산청선 도로에 놓인 다리가 오죽교이다. 이 다리는 1974년 3월 26일 준공되었으며 교명(橋名) 역시 오죽광장과 같은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다.

진주기계공업고등학교(晋州機械工業高等學校)

지금의 상평동 272번지에 있는 진주 기계공업고등학교는 1964년 2월 22일자 진주교육대학교 내에서 현 봉곡초등학교 자리로 이전 수업하였다. 당시의 교장은 이존영씨이며 학교규모는 기계과 4학급, 전기과 1학급, 염직과 1학급과 기계과 실습공장(475㎡), 전기과 실습공장(456.7㎡)으로 운영하다가 1971년 1월 11일자 제7회 졸업생 347명을 끝으로, 총졸업생 1,917명을 배출하고 동년 2월 28일자 현 상평동에 있는 학교로 이전하였으며 당시 교장은 정원수씨였다.

KTC화물자동차영업소(貨物自動車營業所)

서부농협 근처 구 산청선 국도변에 일제시 진주육운화물자동차회사가 본사는 칠암동에 있었고, 이곳에 영업소가 있었는데 그 기능은 주로 정부미를 함양, 산청, 거창등지로 운송하고 돌아올 때 장작(火木)과 숯을 운반하고 있었으나 운임을 회사에 납입치 않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곳 영업소에서 감시 역할을 하기도 하였는데 본 회사가 해방 후부터는 진주 KTC화물자동차회사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본 회사 내에 진주축구대표선수가 많이 근무하였고 특히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축구선수였던 우정환씨(일명 오토바이)도 본 회사 소속이며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바도 있었다.

시근밭들

진주시내 서북부에 위치한 봉곡동 일부와 상봉서동 서반부로 옛날 논밭으로 이루어진 넓은 농경지였으며 이 일대를 시근밭들이라 하였다.

논물새미

시근밭들 북편 산청방면으로 가는 구 도로가 동서로 가로질러 있고 이길의 시내쪽 모퉁이에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을 논물새미라 하였다. 이 우물은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마른 적이 없고 물맛이 좋아서 시민의 식수로 최적격 이었다. 그리고 일제 때 이 주변에 일본인이 20여호가 거주하였고 그곳에 몽당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하나 알길이 없다.

농쟁이 마당

시근밭들 한편에 약간 넓은 광장이 있었는데 이곳을 농쟁이 마당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진주에서 가장 큰 장작시장(火木市長)으로서 인근 명석면이나 산청등지의 주민들의 땔감인 장작, 솔가지, 갈비등을 동으로 만들어 지게나 소달구지에 싣고 오는 장사꾼들이 매일 100여명이 모여 땔감의 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지면 10여일전부터 그 장사꾼들로 부터 땔감을 조금씩 거두어 보름날이면 산채(山寨)같은 달집을 세워 달이 뜰 무렵 불을 지펴 진주시민의 모든 재앙과 액을 불태워 날려 보내고 진주시의 번영과 풍년과 무사를 기원하기도 했다.

남성동

연혁

본시 진주군 성내면 1동.2동(진주군 성내면 1동.2동)각 일부와 5동(동)지역이다. 1914년 3월 1일에는 이들 지역을 통합하여 진주면 내성동(진주면 내성동)이라 하였다. 1932년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식 지명으로 개칭되어 남산정(남산정)이라 하였다. 1949년 8월 15일에는 남성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창렬사(彰烈祠)

선조25년(임진 : 1592), 이른바 임진왜란을 겪었다. 이 해 10월 초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된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김시민 : 1554~1592)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불과 3,800명의 군사로서, 3만여 명의 왜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저 유명한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이 전투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절하였다. 다음해인 계사년(선조26년 : 1593)에는 전년에 패한 원한을 품은 왜군 10여만 명이 또 침략해 왔다. 6월 15일에 작전행동을 시작한 왜군은 6월 19일부터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여 왔는데, 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 계속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 관. 군이 장렬히 순절했다. 그리하여 진주목에서는 진주성 내에 단선(단선)을 쌓고, 매년 6월 29일에 관에서 제사를 지내왔는데, 선조40년(정미 : 1607)에는 경상도관찰사 정사호(정사호 : 1553~?)에 의해 사우를 창건하고, 춘추로 경건하게 제사를 받들 도록함과 동시ㅓ에, 이를 조정에 계청하여 창렬사(창렬사)가 사액되었다.(진양지)

창열사

김천일, 황 진, 최경회(이후, 차츰 26위를 추배하여 29위를 향사함)

광해군11년(기미 : 1619) 7월에는 진주성대첩의 영웅 김시민을 기리기 위해, 부사 성여신(부사 성여신 : 1546~1632)이 찬 한, 진주전성각적비(진주전성각적비)를 세웠고, 숙종12년(병인 : 1686) 8월에는 김시민을 비롯하여, 창렬사에 위패가 봉안된 29위의 명단이 소개된 이민서(서하 이민서 : 1633~1688)가 찬 한, 촉석정충단비를 세웠다.

창렬사

김시민, 황 진,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이 잠, 이종인, 성영달, 장 윤, 윤사복, 이인민, 손승선, 정유경, 김태백, 양 제, 박안도, 양산숙, 김상건, 강희열, 김준민, 조경현, 최기필, 유 함, 이 욱, 감희복, 장윤현, 박승남, 하계선, 최언양, 고종후, 이 잠, 이종인 성영달, 윤사복, 이인민, 손승선, 정유경, 김태백, 박안도, 양 제그간 충민사의 사액에 대하여,『여지도서』.『진주목읍지』등에서 다만 “정미사액”이라고 한 것을, 이를『진양속지』 및 국역『진주목읍지』의 역주에 의해, 충민사도 창렬사와 같이 선조40년(정미 : 1607)에 사액된 것처럼 표기함으로써 이래도 와전되어 왔다. 경종2년(임인 : 1722)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진한(최진한)이 조정에 계청하여 창렬사를 중수하고 위차를 계정하였다.(여지도서.진주목읍지)

충민사

김시민

창렬사

김천일, 황 진, 고종후, 이 잠, 이종인, 김상건, 양산숙, 성영달, 강희열, 김준민, 장 윤, 조경형, 윤사복, 최기필, dnb 함, 이 욱, 이인민, 강희복, 장윤현, 손승선, 정유경, 김태백, 박승남, 양 제, 하계선, 박안도, 최언양.순조2년(임술 : 1802)에는 창렬사에 류복립과 이의정을 추배하였다.(순조실록.충렬실록.진양속지) 고종5년(무진 : 1868)에는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충민사를 훼철하고, 김시민은 창렬사로 합사하였다.(진주군읍지.진양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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