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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리(加芳里)

고려조(高麗朝) 때부터 마을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조 때에는 진주군, 대여촌면의 속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진주군 대여촌면(代如村面), 기동(基洞), 가방동(加芳洞), 사곡동(沙谷洞)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방리(加芳里)라 하였다. 남성(南星), 석교(石橋), 관방(冠坊)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시설채소가 주 소득원이다. 본래 이곳은 갓방 또는 관방, 갑방, 가방이라고 하였는데 금산면 내 방(坊)이 두 개로서 관방(冠坊)과 안심방(安心坊)이 곧 그것이다.

남성(南星)

본래 진주군 대여촌면의 지역이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의 통폐합으로 금산면 가방리에 통합된 마을이다.

검당골(黔堂谷)

남성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검당골못

검당골 마을 앞에 있는 못이다.

기동(基洞)

남성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텃골이라고도 한다.

대모통이

검당골 동쪽 현 가방초등학교 입구에 있다.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장수와 많은 군졸이 산과 들에서 훈련했는데 간신배에 몰려 억울하게 잡혀 살해되었다고 하여 너무 억울하게 죽은 넋이 대나무로 솟아났다고 하여 대모 통이라 한다.

석교(石橋)

남성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1900년대 초계변씨가 처음 터전을 잡은 마을로서 남성마을 일부였으나 1982년 석교마을로 분리되었다. 마을 앞 하천의 길이 5m의 돌다리가 있었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고등산(高嶝山)

돌다리 마을 뒤편에 있는 산이다. 지형이 고동처럼 생겼다 하여 고동 골이라 부른다.

윗들

돌다리 앞 덕의 마을 뒤쪽에 있는 들이다.

디지기웅덩

남쪽에 있는 논들이다. 디지기(두더지)가 팠다하여 지은 이름이다.

선박새미

돌다리 앞에 있는 셈이다.

관방(冠坊)

본래 진주군 대여촌면의 지역으로 조선조 초기부터 있던 마을이다. 가방리3개 행정리동 중 단독 마을이다. 옛부터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관방이라 하였다.

망고개

관장마을과 사동마을을 오가는 고개이다. 이조판서 이준민(李俊民)이 일시 귀향하던 중 수성 촌(修誠村)에 사는 수찬 강은태(修誠姜應台)와 상론(相論)코자 가방(街坊)으로 간다는 말을 전하고 기다리던 고개인데 이를 후인이 망고 개라고 하였다.

독재골

동리와 떨어진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독고사(篤古寺)가 있어 후인이 독고 사에 연유하여 독재 골이라고 부른다.

개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가방들(嘉坊)

마을 앞에 있는 큰 들이다. 남강댐 준공 이전에는 남강이 자주 범람하여 들이 절반 이상이 왕 모래밭 이었으나 지금은 경지정리가 잘된 들이다.

논들새미

동쪽 논들에 있다. 수량(水量)이 풍부한 샘이다. 한때 간이상수도 수원이기도 하였다.

안모리

안쪽에 있는 모퉁이이다.

안모리밑덤

안모리밑에 있는 절벽이다.

방모리

바깥쪽에 있는 모퉁이이다.

방모리더미

방모리 밑에 있는 덤이다.

밤상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서원갓

북쪽에 있는 산이다. 임천서원(臨川書員)의 소유에서 연유된 것이다.

대명화(大明花)

줄기와 잎이 두견화와 비슷하여 꽃잎이 조밀하고 겹으로 된 나무이다. 세종대왕의 왕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명천자(大 明天子)로부터 상으로 받은 것이 심상서(沈尙書) 유상서(柳尙書) 문두징(文斗徵)으 로 차례차례 물려 전하여졌고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아무 탈 없이 자라고 있으며 명나로부터 전하였다 하여 대명화하고 한다. 모성재(慕醒齋) 화단에 있다.

임천서원(臨川書院)

관방마을 중앙에 있다. 조선조 숙종 28년(1702년)에 신암 이준민 (新庵李俊民), 성재 강웅태(誠齋姜應台), 부사 성여신(浮査成汝信), 창주하증(滄州 河憎), 조은 한몽삼(釣隱韓夢參) 이 창건하였으나 고종(高宗) 무진년에 조령에 의하여 훼철(毁撤)되었다가 1937년에 복원(復元)되었다.

추보재(追報齋)

전주이씨 문중의 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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